[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강선필은 3.1혁명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가 출감하였다. 경성고보에서도 불령선인으로 퇴학당하였다. 이후 고향인 당진으로 낙향한 강선필은 동생인 강선국 등과 더불어 천도교 당진종리원에서 활동하였다.

생가 터 우측 구릉에 위치한 강선필 묘의 모습이다. 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가 터 우측 구릉에 위치한 강선필 묘의 모습이다. 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선필이 천도교와 인연을 맺은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3.1혁명 당시 일제의 신문조서에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무종교라고 답하였다. 이를 그대로 믿는다면 강선필은 1920년대 이후에 천도교에 입도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쉽게 믿기 어렵다. 오히려 강선필의 고향인 순성면 성북리 유동 일대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본거지였던 점을 고려하면, 강선필의 집안은 선대부터 천도교인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일제에 검거된 후 신문을 받으면서 무종교라고 진술했던 것은 3.1혁명을 손병희 등 천도교에서 주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이었기에 무종교로 진술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강선필은 당진에서 천도교를 대표한 인물로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8월9일, 당진회관에서 개최된 당진청년회 창립총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년 5월7일에는 합덕에 있던 동아일보 당진지국 내에서 우리상회라는 소비조합이 창립될 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생가 터 우측 구릉에 위치한 강선필 묘의 모습이다. 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가 터 우측 구릉에 위치한 강선필 묘의 모습이다. 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활동은 1820년대 국내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펼친 활동의 한 형태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러한 성과는 좌우가 합작한 신간회 창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당진에서도 신간회 지회가 창립되었는데, 강선필은 신간회 당진지회 창립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1927년 11월4일 당진읍내 천도교 당진종리원에서 개최된 신간회 당진지회 설립을 위한 준비회에서 강선필은 임시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였다.

신간회 당진지회는 1927년 12월6일에 당진 청년 회관에서 창립되었다. 이때 강선필은 임원을 맡아 신간회 당진지회의 핵심 인물로 줄곧 활동하였다. 1931년 1월20일 신간회 당진지회의 해소 과정에서도 집행위원 및 대표 회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신간회가 해소되고 난 이후 강선필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강선필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37년 5월10일의 일이다. 이때 강선필은 충청남도 평의원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도평의회는 3.1혁명 이후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방식이 변화하면서 만들어진 통치기구 중 하나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이후 무단통치로 조선인을 억압하는 통치 정책을 펼쳤다.

이런 억압 통치에 반발하여 독립운동이 본격화되고, 3.1혁명이 일어나자 일제는 통치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도평의회가 1920년 10월 들어 조선 13도에 설치되고, 평의원을 주민 직접 투표로 선출하며, 4년의 임기를 보장하는 등 민주적인 방식의 합법 기구라는 외형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인의 저항을 체제내로 끌어 들여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어용기구였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렇듯 도평의회가 친일 통치기구였다는 것은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도평의회는 이른바 불령선인 등 독립운동가나 중범죄자, 공산주의자에게는 입후보 자격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강선필이 일제의 어용 통치기구인 도평의원에 입후보하였다는 것만으로 스스로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했다는 말과 같았다.

강선필은 3.1혁명에 참여하였던 이유로 복역한 사실이 있던 인물이다. 불령선인으로 경성고보에서 퇴학당한 사실도 있었다. 이런 강선필이 도평의회 의원으로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전향의 뜻을 보이지 않고서는 가능했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선필이 도평의회 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 확실히 전향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친일행위에 적극 가담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해방 이후 강선필은 우익 쪽에서 활동하였다. 동생인 강선국이 좌익 활동을 하면서 당진군 인민위원장을 역임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더욱이 동생인 강선국이 한국전쟁 때 학살당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한국전쟁은 강선필에게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강선필은 1976년 사망하였고, 무덤은 순성면 성북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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