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역사산책] 3.1혁명을 지원하고 참여한 순성출신 강선필Ⅳ
[당진신문 역사산책] 3.1혁명을 지원하고 참여한 순성출신 강선필Ⅳ
  • 당진신문
  • 승인 2018.09.14 16:17
  • 호수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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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
강선필
강선필

[당진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 이렇듯 강선필은 3.1혁명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격문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강선필이 이렇게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강선필 스스로가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독립만세시위를 통해 독립선언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강선필과 박노영, 박수찬을 조사한 일제의 신문조서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박노영과 박수찬은 강선필이 자금을 제공한 이유에 대해 격문을 발행하는데 필요한 자금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강선필도 격문을 제작 배포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를 묻는 일제의 질문에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그런 인쇄물을 발행하고 배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분명하게 답변하였다.

이것으로 일제는 강선필이 제공한 자금을 독립운동을 위한 목적으로 제공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강선필에게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를 붙여 기소하였다. 재판에 넘겨진 강선필과 친구들은 일반 만세시위 참여자들과 비교하여 중대한 범죄자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처벌받은 형량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주범에 해당하는 박노영이 받은 징역2년의 형량은 3.1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민족대표들과 비교해도 중형에 해당하는 형량이었다. 당시 민족대표들 중에는 주동자에 해당하는 손병희나 이승훈 등 핵심인사들이 3년의 징역형을 받았을 뿐, 나머지 민족대표들은 참여 정도에 따라서는 학생인 박노영의 형량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아직 20세에 지나지 않았고, 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불과한 박노영에게 징역2년의 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이들이 제작하여 배포한 격문이 일제에게는 얼마나 경계해야할 대상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함께 참여했던 양재순, 박수찬도 징역 1년 6월에 처해졌고, 김세룡, 김호준은 징역1년에 처해졌으며, 최사열, 김준희 역시 징역 8월에 처해졌다. 그리고 단순히 자금을 지원한 강선필과 교회에서 쓰던 등사기를 빌려준 유석우에 대해서까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이란 중형을 판결하였다.

강선필이 3.1혁명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일은 경성에서 그치지 않았다. 강선필은 아버지와 함께 귀향한 이후 고향에 있으면서 3월10일 면천에서 일어났던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시위에도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다. 3.1혁명이 일어난 이후 경성에 유학해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귀향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의 귀향은 3.1혁명을 전파하여 전국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강선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면천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에 관여하였다. 3.10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시위는 면천공립보통학교 4학년이던 원용은, 박창신, 이종원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였다. 이 시위를 주도한 원용은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성에 갔다가 3.1혁명을 경험하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귀향한 원용은은 박창신, 이종원 등과 함께 면천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마침 면천공립보통학교 선배인 강선필이 귀향하자 원용은은 원규상을 통해 강선필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원규상은 성북리 유동 출신으로 강선필과는 고향 친구이자 면천공립보통학교 후배였다. 원규상을 통해 원용은의 요청을 받은 강선필은 자신이 경성에서 가지고 온 여러 정보를 제공하였다. 강선필이 원용은에게 제공한 정보 중에는 경성에서 불리어졌던 노래도 있었다. 이 노래를 면천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에서 ‘독립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등사하여 사용하였다.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는 독립의 의지를 드러내기에 좋은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강선필의 활동은 3.1혁명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경우였다. 그것이 비록 직접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던 적극적인 참여 방법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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