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민족예술가 심훈의 혼불과 한류문화2
당진의 민족예술가 심훈의 혼불과 한류문화2
  • 김형환 (사)심훈상록수기념사업회공동회장
  • 승인 2018.09.13 13:16
  • 호수 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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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록수 여자 모델 최용신의 천곡 강습소 천곡학원

최용신
최용신

[당진신문 기획연재] 최용신 선생은 농촌운동가이자 민족운동가로서 심훈의 ‘상록수’ 소설여주인공의 모델로 YWCA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며 기독교농촌운동의 일환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특징이 있었다. 당시 YWCA의 농촌파견교사로 임명되어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군 천곡리에 파견되면서 그는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의 아픔을 함께하면서 농촌의 아동을 민족의 동량으로 키우는 구국교육운동에 나섰다.

신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처녀로서의 수줍음도 버린채 맨발로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매며 농촌부녀들과 함께 구슬같은 땀을 흘렸다. 밤에는 “가갸거겨” 야학을 하고 재봉 수예 등을 가르치며 1인 4역을 하면서 학생들이 늘어나 교육장소가 좁아서 강습소를 건축하기로 하였다.
천곡(샘골)에서 활동을 한지 8개월이 되어 강습소 건축허가를 받아냈으나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아 실망도 되었으나 동네 유지들을 찾아가 협조를 구하며 60원을 모금하게 되었고 강습소를 지을 목재와 기둥은 감자골에서, 서까래는 일리 야산에서, 목수는 독적골에 사는 학부형이 싼값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드디어 밤낮 없이 남녀노소 동네사람들이 한데 뭉쳐 일하기 시작하였다. 목수는 나무를 켜고 깎고 너나없이 횃불을 켜들고 터를 닦고 아낙네들은 새끼를 꼬고 햇수수대를 베어다가 외를 엮었으며 아이들은 치마로 바구니로 돌을 주워 날랐다.
강습소 건축을 시작한지 한 달 남짓한 10월 27일에 정초식을 갖고 이듬해 1933년 1월 15일에 낙성식을 가졌으며 낙성식 수지결산 보고는 건축비 총수입 450원, 지출이 657원으로 200원이 부족했는데 낙성식에서 모금된 217원 50전 그리고 쌀 20가마로 모든 빚을 갚고 남게 되었다.

최용신의 강습소 최용신 기념관
최용신의 강습소 최용신 기념관

최용신은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지친 몸을 쉴 틈도 없이 11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며 일제는 60명 이상은 수용할 수 없다고 하며 학원인가도 내어줄 수 없다고 오라 가라 하며 또 수난을 겪게 되었다.
최용신은 천곡강습소의 교장으로 평교사로, 마을 주부회와 청년회의 지도자로 천곡교회의 종으로서 천곡의 이곳저곳에 그녀의 손길이 아니 거친 데가 없이 그는 천곡의 수호천사였다.
이리 저리뛰며 달리며 지친 몸을 쉴사이 없이 까물아친 최용신은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최용신은 25년 6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수 많은 고난 속에서 장중첩증에 의하여 하늘나라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끄응” 하고 안간 힘을 쓰며 턱밑까지 닥쳐온 죽음을 한걸음 물리쳤다. 혀끝을 굴리지 못하다가 “학원만은 잘 살려주세요. 학원이 잘 보이는 데다 묻어주세요” 주위 사람들이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에 “사 사 삼천리”를 읊조린다.
(상록수 제12호 최용신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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