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이선우 작가] 얼마 전 한국방송작가협회보에 실을 기고문을 의뢰 받고 역시나 마감의 턱밑까지 닥쳐서 겨우 써냈다. 작가협회보에 실을 글이니 작가로서의 나를 돌아보는 내용이어야겠다는 가닥은 잡았지만 그 당시 나는 무려 ‘셀프리더십’을 주제로 한 5회차 강의 자료를 만드느라 내 발등을 찍고 있던 때였다. 마감을 지켜야 하는 삶을 산지 이십년이 가까워오는데도 도무지 이 마감과는 친해지질 않는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당진신문 마감날을 까맣게 잊고 룰루랄라 충남서부평생학습관에 찾아가 자서전쓰기지도사 양성과정 수업을 청강 중이었다. 당진에서 어떻게 지도자를 양성하고 함께 사업을 펼쳐야 할까 고민을 나누러 간 자리였다.


“배우는 것은 강렬한 쾌락이다. 배우는 것은 태어나는 것에 속한다. 몇 살을 먹었든 간에 배우는 자의 육체는 그때 일종의 확장을 체험한다. … (중략) … 무언가 다른 것에 열중하는 것, 사랑하는 것, 배우는 것, 그것은 같은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은밀한 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배운다는 강렬한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사람이 있다. ... (중략)

방송만 할 때와 전혀 다른 삶 같은데 가만 생각해보면 또 그리 다르지도 않다. 예나 지금이나 ‘재미없으면 안 한다’는 개똥철학은 변함이 없다. (돈 되면 다 해야지 무슨 재미타령이냐고 타박하던 어느 피디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어쨌든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웃거리다보니 오늘 이 지경이 되었다. 지난 해 여름 우연히 접한 애니어그램 검사에서 내려진 ‘결단력 부족한 쾌락주의자’라는 진단이 이런 내 모습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정확하다. 프랑스의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의 말처럼 나는 배움이라는 강렬한 쾌락에 빠진 것이다. ... (중략)

문청 시절 겉멋에 끼고 다녔던 니체를 최근에서야 정독하고 있는데 그 중에 그런 말이 있다. “정의로운 자는 스스로 서둘러 판단하는 것을 삼간다. 정의로운 자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자이고, 정의로운 자는 남에게 친절한 자다.” 니체 덕분에 요즘 나의 화두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되었다. 강렬한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지만 그것이 또 다른 내 인생의 밑그림은 아니다. 방송작가로서의 직업적 성취는 포기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냥 방송작가일 뿐이다ㅎㅎ 친절한 사람,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 그리하여 정의로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기념으로 꽂아둔 협회보를 꺼내 후루룩 들춰보았다. 다시 천천히 읽어보니, 작가로 치열하게 살지 못하고 딴 길로 샌 것 같은 내 자신을 변명하느라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구나 싶다. 하아...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일단, 서울부터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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