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 준 (朴哲濬) (예) 공군대령

후금군의 대공세와 충의지심(忠義之心)

남이흥이 안주성에 입성한 것은 그 하루 전의 일이었다. 안주는 원래 서북의 요충지로 수 만명의 상비병력을 보유하는 병영이었지만 이괄의 난으로 모두 없어지고 텅 빈 상태였다.
다급해진 남이흥은 평안감사에게 장계(狀啓)를 보내 증원군을 요청하고 인근의 모든 병사와 민간인까지 끌어 모아 겨우 3,000명 병사를 채웠다.


10대 1의 중과부적이었으니 승패는 뻔한 노릇이었다. 성을 사수하기로 맹세한 남이흥이 믿을 것은 충의지심(忠義之心) 뿐이었다. 그는 고을 주민을 모두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민가는 화공을 피하기 위해 불을 지르는 등 전투태세를 명했다.


후금군은 이내 1만4,000명 병력을 산개시켜 안주 성벽을 기어오르게 하였다. 6,000여 기병 등 나머지 병력은 성 주위를 맴돌며 사격을 가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병력을 엄호했다. 조선군의 화포가 불을 뿜자 공격이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이내 압도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성안은 방어전을 펼치느라 흡사 펄펄 끓는 물처럼 혼란스러웠다. 북문과 동벽, 남벽을 돌아가며 공세는 계속됐다.
결국 1월21일 오후 4시, 후금군은 안주성 동남쪽 성첩(城堞)에 사다리를 거는 데 성공했다. 성안으로 후금군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전열이 흔들리자 북방 성벽에도 높은 사닥다리(雲梯)가 걸렸고 이어 사대문이 모두 부서져 나갔다.
그야말로 백병전이었다. 절대 열세였던 조선군은 이내 화살과 무기가 떨어져 후퇴를 거듭해 관아에까지 밀려났다. 후금군이 관아를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좌충우돌하며 밀려오는 적의 기세는 극성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구름 같은 병력이었다.


성안은 온통 적뿐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왔다고 판단한 남이흥은 준비해놓은 화약고에 불을 붙이려고 마음먹었다. 평소 아끼던 부하들에게 몸을 피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들 역시 “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외치며 끝까지 항전했다. 마침내 남이흥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고 관아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아군은 물론이고 적군 수 천명도 한꺼번에 폭사했다.


적장도 감동한 남이흥 장군의 산화

이렇게 해서 정묘호란의 첫 방어선이던 안주성이 무너져내렸다.
이때 남이흥의 나이 52세였다.
【인조임금이 친히 덮어준 곤룡포(袞龍袍)】안주성에서 벌인 조선군의 최후항전은 후금군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피해도 엄청났다. 후금군 총대장 패륵 아민조차 머리를 조아려 곡을 하며 “조선은 충의의 나라라더니 내 이제 그 참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말했다 한다.
감동한 패륵 아민은 성안에서 패잔병을 죽이는 부하들을 말렸고, 수백명의 포로를 석방했다. 후금군의 전투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남이흥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한번 무너진 전선은 어쩔 도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평양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남이흥의 지원요청을 거절했던 평안감사는 후금군의 남진 소식에 40명의 군관을 대동하고 성을 빠져나갔다.


대다수 병사가 도망친 평양성에는 2,000여 군민만이 남아 전판관 김준덕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항전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후금군은 이들을 무시하고 계속 남진했다. 황주에서 제2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황해병사도 평안감사가 성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1월25일 봉산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지거나 귀양에 보내졌다.


남이흥의 장례는 인조의 명에 따라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임금이 친히 참석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관을 덮었다. 남이흥에게 내려진 사패지지(賜牌之地·공신에게 내려진 토지)는 당진군 대호지면 전부와 정미면 일부가 포함되는 엄청난 넓이였다.


현종 때인 1663년에는 충장공이란 시호도 내려졌다. 숙종 6년에는 안주에 사당을 지어 충민사(忠愍祠)라는 사액을 내리기도 했다.
중국대륙을 분할하던 명나라 또한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황궁으로 가는 길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붉은 기를 내걸었다.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했던 남이흥의 친척이 극진한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이 무렵 중국야사에는 다음과 같은 남이흥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열렬한 충성과 빛나는 절개는 적도 능히 구부러뜨리지 못했고 불도 또한 태우지 못했네. 기운은 산하보다도 장하였고 이름은 중국 천지에까지 가득찼으니, 예부터 사불사(死不死·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노라.


남이흥을 숭모하며

당진군 대호지면 도이리에는 충장공(忠壯公) 남이흥장군의 위패를 모신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으로 건립한 충장사(忠壯祠)와 양세충신정여문이있다. 이 곳 충장사 경내에는 장군의 유물 전시관인 모충관(慕忠館)이 있는데 약 500여 점에 달하는 장군의 유품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유품은 정묘호란 순절 후 장례시 인조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고 친히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었다는 곤룡포와 1627년 평안병사(平安兵使)로 발탁되었을 때 안주(安州)에서 호신용(護身用)으로 입었다는 녹구의(鹿구衣)가 있으며, 장군의 호패 1점, 후손의 호패 6점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아직 미지정 되어있는 민속자료에 이괄의 난을 평정한 장군의 진무공신교지에는 이괄의 난에 참여한 32인 충의장령의 성명 공적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공신교지가 있으며, 정묘호란 이후 조정에서 평안도 안주에 충민사 사당을 사액하고 장군을 주벽으로 16인의 충의장령이 봉안된 충민사 정당위차 사료가 있고,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에서 순절 후 당시 조선국과 우호국인 명나라 조정에서 남이흥장군 충절을 기리며 명나라 국민에게 귀감하게 하는 특전을 했다는 사료 2점 특전사료가 있다.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의천부원군(宜春府院君) 남이흥장군 양대(兩代)충신에게 임금께서 부(賻) 상(賞)으로 내려준 13개 동 · 리의 토지 사패절목(賜牌節目:당시등기부등본)이 있다. 이외에도 서한(書翰), 고서(古書), 의류(衣類), 영정(影幀), 좌의정교지외 60여점의 교지, 장군의 관(棺)(내관, 외관)부인 정경부인 하동정씨(鄭氏)의 관(내관, 외관), 청기와 출토품등 많은 유물이 있다.


충장사 밑에는 인조 14년(1636)에 세운 남유, 남이흥 부자의 충신 정려(旌閭)인「남씨양세충신정려(南氏兩世忠臣旌閭)」가 있다. 남이흥장군의 탄신일인 매년 9월 10일 장군의 충절과 호국정신을 기리는 문화제 행사를 하고 있다.


장군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에 있던 것을 1971년 성남단지 조성으로 인해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968년에 충장사를 보수하고, 1979년에는 유물전시관인 모충관(慕忠館)을 건립하였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