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기획연재] 심훈은 ‘그날이 오면’ 시와 ‘상록수’ 계몽소설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타오르는 횃불을 높이 밝혔던자유주의 민족예술가이다. 이에 심훈탄생 117주년(9월 12일)과 심훈서거 82주년(9월 16일)을 맞이하여 그의 혼불로 형성된 한류문화를 기리고자 한다.

기미년 함성과 피를 찍어 쓰듯 토해낸 ‘그날이 오면’과 ‘상록수’는 일제강점기와 6.25의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조국근대화와 새 역사 창조의 뿌리가 되어왔다.

특히 상록수소설의 여자모델 실제인물은 함남 덕원군 두남리 출신 최용신이며, 남자모델 실제인물은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출신으로 엮어져 남과 북이 함께 애독해 온 소설이다보니 아리랑과 같은 친근감으로 한민족정서를 형성해 왔다.

1932년 심훈은 일제의 간섭을 피하여 선조의 고향 당진으로 내려가 손수 필경사를 짓고 집필에 전념하였듯이 당시의 시대적 풍조였던 브나로드(vnarod)운동에 영향을 받는 등 수 많은 젊은이들이 ‘그날이 오면’과 ‘상록수’를 읽고 농촌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달려가게 했다. 

심훈 상록수 정신문화는 우리고장의 향토지적재산으로 조국근대화와 새 역사 창조의 문화 창출물로 그 정체성을 재정립하여 한류문화로 승화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에 심훈 상록수 정신문화의 산실, 심훈이 상록수를 집필한 <당진의 필경사>와 상록수여자모델 최용신의 <강습소천곡학원 최용신 기념관>과 상록수남자모델 심재영과 공동경작회, 야학당상록학원, 그리고 근간에 전개되고 있는 주요 사료들을 찾아 살펴보면서 심훈탄생 117주년과 서거 82주년을 기리고저 각 부문에 관련해 연구활동한 전문인의 자료를 발췌해 요약했다.

1. 필경사에서 상록수를 집필한 심훈

필경사
필경사

‘상록수’라는 한그루 푸른 나무를 우리문학에 영원히 심어 놓고 일제의 탄압이 가장 극심해져가던 1930년대 중반 암울한 시기에 젊은 나이로 요절한 심훈(본명 심대섭). 그는 1901년 9월 12일, 유복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3.1운동에 가담하면서 민족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의 문학이 한창 개화되기 시작한 36세 때, 대표작이 된 ‘상록수’의 출판관계로 성경했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결식장에서 낭송되어 식장을 더욱 비장케 했다는 손기정 마라톤 제패소식에 지은 즉흥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에서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민족이라고 부를 터이냐!”고 소리 높여 외쳤던 민족주의자 심훈.

민족의 삶과 꿈을 시, 영화, 연극, 소설 등 여러 장르를 통해 마음껏 나래를 펼쳤던 로맨티스트이자 자유주의자였던 심훈의 문학적 활동은 3.1운동에서 시작됐다.

당시 경성제일고보 4학년에 재학중이던 심훈은 3.1운동에 가담하여 3월 5일에 투옥되었고 그해 7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때 옥중에서 비밀리 부쳐진 편지 ‘어머님께 드리는 글월’이 그의 첫 작품이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한국에는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백분이요, 또 몇 만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 심훈은 바로 그의  마지막 시에서 말하고 있듯이 짧은 생을 민족을 위해 살아온 민족예술가였다.

출옥 후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이 기간 동안 많은 시를 썼던 그는 1923년에 귀국, 당시 급진적 문예조직이었던 ‘염군사’ 그리고 ‘카프’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때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영역은 영화였고 창작은 주로 시 분야였다.

시나리오 ‘탈춤’을 집필하고 실제 연기자로도 활동했으며 ‘장한몽’, ‘춘희’ 영화 ‘먼동이 틀 때’에서는 시나리오 집필과 감독까지 맡아 개봉하기도 했다.

1930년에 들어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시작했고 또한 그 무렵부터 그가 몸담아 왔던 ‘카프’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또한 그에 맞서 있던 ‘국민문학’도 함께 비판을 하면서 민족적 삶을 위한 소설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써왔던 시를 모아 시집 ‘그날이 오면’을 간행하고 동시에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일제로부터 내용 불온을 이유로 정지처분을 받고 다시 제명을 바꾸어 ‘불사조’를 연재했으나 이것도 같은 이유로 중지됐다.

그 후 그는 1932년 일본의 압제를 떠나 선조의 고향 당진으로 낙향을 하게 된다. 그는 소설 집필에 전념하며 1935년에 ‘영원의 미소’를 집필하고 1934년에 장편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여 그 고료로 당진 부곡리에 직접 설계해 집을 지어 ‘필경사’라 불렀다.

이후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공모에 5월 5일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6월 26일까지 55일 만에 원고 1,500매 분량의 소설 ‘상록수’를 탈고해 당선된다.

특히 이 기간 동안 그는 실제 농촌에 살면서 농민의 삶을 접하고 또한 당시 그 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동경작회’ 회원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농촌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심훈이 이토록 빠른 기간에 ‘상록수’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노력형이기 보다는 재주형의 작가라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실제인물을 모델로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록수 제9호. 전 성균관대 윤병로 교수 글에서 발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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