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강선필(姜善弼)은 1896년 순성면 성북리 478번지에서 태어났다. 순성면 성북리 478번지 일대는 성북리 중에서도 유동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강선필의 본적지인 순성면 성북리 478번지는 순성에서 당진으로 향하는 성북리 도로변에 있는데 옛 유동초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아미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순성면 성북리는 몽산성의 북쪽 뒤편을 뜻하는 지명으로 순 우리말로는 잣뒤라고도 불리는데 진주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마을이다. 강선필은 근대시기 면천에 공립보통학교가 생기면서 면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회 졸업생이 되었다.

강선필의 옛집터인 아미 미술관 전경.
강선필의 옛집터인 아미 미술관 전경.

강선필은 면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면천공립보통학교 졸업생 중 처음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인물이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강선필은 3.1혁명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으로 24살의 청년이었다. 근대 교육기관이 처음 생겨났던 초창기 때였다고 해도 24살의 나이에 경성고보 3학년생이었다면 강선필은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다. 이렇듯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에 당진에서 경성으로 유학 올 수 있었던 만큼 강선필에 대한 주변의 기대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당시 강선필은 아버지가 순성에서 농장을 운영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에 속했다. 농장의 규모도 원래는 2만원 정도였는데 매년 성장하여 1919년 당시에는 5만원 정도로 자산이 불어났다고 강선필은 진술하고 있다.

강선필이 경성고보 3학년이던 1919년은 일대 격동기였다. 이때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3.1혁명이 일어났고, 강선필도 3.1혁명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강선필을 체포한 일제 경찰은 이때의 상황을 신문조서를 통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강선필은 1919년 3월1일 경성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강선필은 3월1일 경성고보 동급생인 박노영이 고종의 장례행사인 국장 연습이 끝나는 대로 파고다공원으로 모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3월1일 국장 구경을 위해 상경하기로 약속한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남대문역에 갔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남대문역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경성시내를 돌며 만세를 부르던 시위대를 보았지만 아버지가 언제 경성에 올지 몰라 기다리는 중이라서 시위대열에 합류하거나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일제가 중요한 문제로 주목하였던 3월5일 남대문역 학생시위에 강선필이 참여하였는지를 추궁하는 신문에도 아버지가 상경하여 하숙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모르게 만세 시위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3월7일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으므로 3.1혁명 과정에서 벌어진 독립만세 시위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이상의 진술 내용만을 놓고 살펴보면 강선필이 경성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물론 강선필이 체포된 이후 처벌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는 진술을 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3.1혁명에 참여하였던 20대 전후의 청년들이 진술한 신문조서를 보면, 조선 독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설령 자신의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경우라도 혐의를 축소하는 정도로 소극적인 진술을 하였지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거나 만세를 부른 사실까지 부인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강선필의 신문조서 기록은 강선필이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지만 처벌을 피하려고 혐의 자체를 부인하는 진술을 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일제 또한 이러한 점을 파악하였기에 강선필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강선필이 경성시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는지 여부를 더 이상 추긍한 흔적이 없다. 이것으로 강선필은 1919년 3월1일 이후 경성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는 참여하거나 만세를 불렀던 사실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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