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지리학박사

『내포(內浦)신도시』는 충남의 중심, 행정의 중심지이다. 대전광역시에서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사이로 충남도청이 이전해 오면서 건설되어 본격적인 내포시대를 맞고 있다.

2006년 도청이전 예정지역 공고, 2009년 승인고시, 부지조성, 청사신축 기공식이 있었다. 2010년 내포신도시로 도시명칭을 확정짓고 2008년부터 도청 및 유관기관이 이전하였다. 현재 주거용지 개발, 산업단지 유치, 신도시 활성화를 꽤하고 있다.

내포(內浦)는 순수한 우리말로는 「안-개」라 하여 「바다나 호수가 육지로 후미진 부분」을 말한다. 지리학적으로는 리아스식 해안, 즉, 해안선이 복잡한 충남서북부지역을 말한다. 역사적으로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내포(內浦)라 칭했다. 「내포」의 지역범위는 삽교천 영역을(오늘날의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지점인 당진군 우강면 사발포 지역), 좀 더 큰 범위는 이중환의『택리지』에서 언급한 가야산 주위 10여 고을을, 좀 더 더 큰 범위는 조선시대 이 지역 행정중심지였던 홍주목과 관련한 홍주진관 소관 20여 고을을 말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가장 일반화된 범위는 가야산 주위의 10여 고을 결성ㆍ해미ㆍ태안ㆍ서산ㆍ면천ㆍ당진ㆍ홍주ㆍ덕산ㆍ예산ㆍ신창 등을 말한다. 현재 시군명으로는 예산군, 당진군, 홍성군, 서산시, 태안군, 옛 보령군 지역(천북ㆍ청라ㆍ청소ㆍ주포ㆍ주교ㆍ오천ㆍ구보령시), 옛 신창현 지역(아산시 도고면ㆍ신창면ㆍ선장면)으로 5개 시군과 보령 7개 면, 아산 3개 면 지역을 의미한다. 이곳에 본 필자는 청양군의 비봉면, 운곡면 등 청양 2개 면을 추가해 8개 시군을 말한다.
 
내포지역은 동으로 금북정맥(차령산맥)의 본줄기에 가로막혀 충청도의 내륙지방과 격리되어 있고, 오서산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남으로는 오서산에서 보령의 진당산으로 갈라지는 금북정맥의 작은 갈래에 의해 구분된다. 서쪽으로 서해바다를 끼고 있고, 북쪽으로 경기의 연해와 아산만 이남지역이다.

이 중심에 가야산(해발 677m)이 있다. 이 가야산을 중심으로 뺑 둘러 고을이 들어차 있고 삽교천, 무한천을 중심으로 한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대호만, 아산만, 천수만 등 리아스 해안으로  구릉성산지와 해안이 펼쳐져 있다. 따라서 가야산 정상에서는 북쪽의 당진 앞 바다로부터 서쪽의 천수만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이다. 그래서 멀리 갯가에서도 보이는 곳이라 하여 가야산을 순수 우리말로 「개산」이라 한다.

최완수는 내포지역을 금북정맥의 본 줄기가 오서산에서 북진하면서 서쪽으로 부채살처럼 펼쳐지는 많은 지맥들을 만들어 복잡한 대소반도를 형성시켰고, 그 산맥사이를 따라 크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곳 지형이 전체적으로 완만한데다가 바다의 조석간만의 차가 8~9m로 큰 격차를 보이므로 시내마다 거의 모두 갯물이 역류하여 중하류지역은 바다와 직결되었음으로 수 십리 혹은 백 여리에 달하는 물길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바닷물을 끌어 들이기 때문에, 곳곳에 안개〔內浦〕가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지역 전체를 안개, 즉 내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태안반도 일대에서는 안개〔內浦〕라는 지명을 쉽게 볼 수 있다.

내포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내포평야(오늘날 예당평야를 지칭함.)가 크게 형성되면서 이곳에 거주하기보다는 조선후기 서울에 거주하던 부재지주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또한 이곳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각종 문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민중의식이 특히 강했던 지역이다. 또한 18세기 말부터 현대까지 간석지의 개간사업이 활발하여 지리적인 변화가 큰 지역으로 지리적인 변천이 달라짐으로써 취락의 분포, 민속의 변화가 급격히 달라졌다.

종교적으로는 천주교, 동학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개신교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유교는 기호학파, 화서학파 등을 계승한 학자들이 위정척사운동을 일으켰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06년 김복한(金福漢), 이설 등을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주도했으며, 불교는 태안 마애삼존불상, 서산마애삼존불상, 봉산 사면석불 등과 수덕사, 개심사와 같은  백제시대 불상과 절이 가야산지 골골마다 존재해 중국불교유입경로도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규모는 10칸도 되지 않는 작은 사찰이 대부분으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대규모 불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사찰과 석불, 미륵들이 산재해 내포불교의 잠재력이 파악된다. 천주교는 서울에서 남인 벽파 양반 및 중인들에 의해 학문적으로 연구되었는데 1785년 이전 내포지역에 사는 이존창(李存昌 : 1759~1801)에게 전교되어 서울지역과 달리 양인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처음 예산군 신암면 여사울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곳곳에 교우촌(敎友村)이 급속도로 확산되다가 1866년 대박해 당시 충청도 이외 경상도, 강원도지역으로 박해를 피해 삶의 공간을 옮겨가며 천주교를 전파해왔다. 그래서 이 지역은 천주교의 못자리라 표현할 정도로 우리나라 천주교의 산실이 되었다. 이런 대박해가 지나고 혼란은 거듭되어 근대 최초로 1893년 합덕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동학농민군들의 활동도 활발해 천주교 4대 교주인 박인호(朴寅浩)를 중심한 예포와 덕포의 활동이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이창구 등이 내포평야를 장악해 지역물류 유통이 마비상태에 있었고 면천 승전목 전투, 예산 신례원 전투, 홍주성전투, 해미․서산 전투를 치루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시켰다. 이들은 후일 3.1운동, 신간회 활동, 소작쟁이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한편 한말 조선의 개항과 더불어 미국과 문호를 개항하면서 내포지역에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 교계예양(敎界禮讓)으로 불리는 선교지역 분할협정에 따라 충남의 대부분 지역 특히 내포지역은 감리교 전교구역으로 분할되어 1899년 해미교회가 내포지역에 최초로 설립되었다.

1903년 5월 1일 내한한 사애리시(史愛理施ㆍA.H.Sharp)여사, 우리암(禹利岩ㆍWilliam) 선교사, 안명도(安明道ㆍC.C.Amendt) 선교사 등이 광천, 당진 난지도 등 해로를 이용해 교세를 전파함으로써 홍성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1900년 고암리에 박양래(朴良來) 참봉이 기도처를 설립하고 1903년 홍성읍 교동에 예배당을 설립하였다. 당진지역은 1904년 알프레드 사프(R.A.Sharp)가 처음 전교를 시작하여 1904년 당진군 석문면 삼화리에 삼화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외 종파들은 감리교회만큼 전파가 빠르지 못했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해 장로교, 침례교 등이 새롭게 교단을 형성하며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내포지역의 감리교회는 한말, 일제시대를 거쳐 꾸준히 성장해 현재는 한 마을 전체가 기독교인 곳도 있다.

교통로는 주로 간선도로에서 역로가 비켜 있었기 때문에 곳곳에 발달한 포구를 이용한 해상교통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내포지역의 육로는, 서울에서 충청수영에 이르는 도로망과 함께, 서울로 가는 지름길인 대진나루, 충청도의 행정중심지였던 공주와 통하는 차령(차동)고개가 중요하였다. 내포지역의 역참조직은 조선전기에 금정도와 시흥도가 있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그 속역이 모두 금정도에 이속되었다. 근대 교통은 일제의 수탈정책에 따라 1922년에 천안에서 장항선 철도가 들어왔고 일제시대 3등도로가 이 지역에 개설되면서 급변하였고 1979년대 삽교천방조제가 놓여 변화를 꽤하였으며 1990년대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2000년대 초 국도 4차선 확장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급속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해안선은 당진ㆍ서산ㆍ;태안ㆍ홍성ㆍ보령지역으로 길고 출입도 심하다. 큰 하천이 없어서 충적지의 발달이 적으며 해안의 대부분이 구릉지로 되어 있다. 해안에는 20세기에 들어와 간척에 의해 조성된 논이 많이 분포하며 1980년대에는 국내 최대규모의 천수만 간척사업이 이루어졌다. 산업의 근간은 아직은 농업과 수산업이지만 대산공업단지, 석문공단, 부곡공단 등이 조성되고 평택ㆍ당진항이 건설되면서 서해안시대를 열게 될 임해공업단지로 발전하고 있다. 해안에는 해수욕장이 많아 여름철에는 활기가 돈다. 해안과 여러 섬에는 동백나무ㆍ사철나무ㆍ굴거리 나무 등의 상록활엽수가 자생한다. 겨울철에 북서풍이 강하게 불며, 산촌(散村)경관과 농가 주위에 대나무 숲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의 경관적 특색이다.

예당평야는 가야산(678m) 동쪽, 차령산맥 북서쪽의 삽교천유역에 발달한 평야다. 삽교천 하류부가 당진시과 아산시의 경계를 이루기도 하지만 예산군과 당진시에 걸쳐 넓게 발달되어 있으므로 보통 「예당평야」라고 불린다. 무한천ㆍ곡교천ㆍ남원천은 삽교천의 지류이며, 이들 하천은 오늘날 삽교호로 흘러든다. 삽교천은 조석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만조 때는 선박이 덕산의 구만리까지 올라왔다. 평야주변에는 해발 50m이하인 화강암 구릉지가 넓게 펼쳐진다. 1990년의 경지율은 당진군이 43.9%, 예산군이 39.4%로 전국 최상위권에 속했다.

1928년에 착공했으나 1964년에야 준공된 무한천 중상류의 예당저수지는 몽리면적이 약 1만 ha에 이르며, 1979년에 완공된 삽교호의 물은 1단 내지 2단 양수장에 의하여 당진ㆍ예산ㆍ홍성ㆍ아산의 4개 시군에 걸친 2.5만ha의 농경지로 공급된다. 기원이 백제로까지 소급되는 합덕지(合德池)는 삽교천 서쪽 구릉지와 구릉지 사이에 축조되어 약 700ha의 몽리면적에 물을 공급했으나 예당저수지가 완공된 후 논으로 바뀌어 지금은 제방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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