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고희준의 묘비
고희준의 묘비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앞 장에서 살펴 본대로 고희준의 활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식민지 청년의 당당한 독립운동이었지만 일제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이에 대해 일제 조선총독부 검사 산택좌일랑(山澤佐一郞)은 고희준을 재판에 넘기면서 출판법과 보안법을 위반하였다고 활동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시하였다. “3월 2일 경성부 광화문 광장에서 군중과 같이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고, 동월 9일에는 조선은 독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를 기재한 독립선언서라는 제목의 문서 및 시민은 폐점을 하고 소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를 기재한 시민대회라는 제목의 문서를 각각 10장을 임창준에게서 교부받아서 그것을 경성부 봉익동의 노상에서 다수의 조선인에게 배부했고, 또 동월 23일에는 서울 수은동 단성사 앞에서 3·4백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게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

이로써 고희준은 3.1혁명 과정에서 한 활동 내용이 출판법과 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죄목으로 1920년 2월27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니 이미 선고된 징역 8월형 보다 긴 기간을 복역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고희준은 항소를 포기하고 2개월을 더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0년 4월28일 출소하였다. 정확히 1년 1개월을 넘게 복역한 후였다. 고희준의 수형기록을 보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게 된 사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사유가 황당하게도 은면(恩免)이었다. 은면이란 죄를 사면한다는 뜻인데 고희준에게 선고된 8월의 징역형 보다 더 많은 1년 1개월 이상을 구속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황당하기 이르데 없는 이유이다. 이렇게 은면이란 이름으로 석방하였던 것은 일제가 얼마나 악랄하게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는지 알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교활하게 수형제도를 활용하여 식민 통치를 유지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서대문 형무소를 출소한 고희준은 다음 해인 1921년 배재고보에 복학하였다. 그리고 1922년 3월22일 배재고보를 졸업하였다. 고희준의 학교생활은 배재고보의 학적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희준의 출결 사항이다. 고희준은 1학년 때 총 출석일 227일 중 8일의 결석을 제외하고 219일을 출석하였다. 2학년 때도 총 243일 중 239일을 출석하여 4일밖에 결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고희준의 출석율은 당시로서는 매우 우수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근대 교육이 도입된 시기였기에 학생들의 출석율이 높지 않았고, 입학한 학생이 졸업하지 못하고 퇴학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고희준은 근대교육에 열의를 가지고 학교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3학년 때는 총 225일 중 147일을 출석하여 78일씩이나 결석하였고, 복학한 4학년 때는 총 238일 중 184일을 출석하여 54일을 결석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3학년 때인 1918년에서 1919년에는 78일이나 결석한 것은 3.1혁명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할 만 하다. 2학년까지 학교생활에 충실했던 고희준이 갑자기 3학년이 되어서 결석이 많았던 것이 배재고보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활동을 준비했던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또한 4학년 때의 경우는 복학한 이후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학교생활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1년 넘게 복역하면서 고문이나 수형생활로 인해 건강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배재고보를 졸업한 이후 고희준의 활동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면천에 뿌리를 두고 있던 고희준 일가가 면천 생활을 정리하여 경성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고희준의 옛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면천면 자개리40번지는 고희준 일가가 이사한 이후 두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홍씨네는 1920년대 고희준 일가가 김씨네에 집을 팔았고 40년 전에 홍씨네가 이사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고희준 일가는 고희준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이후 곧바로 면천에서 가산을 정리하여 경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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