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일제시대의 오도항 전경
오도(烏島)는 1924년(소화 8년) 방조제가 쌓여 농토화 되었고 이 섬에 김용근의 아버지가 최초로 가서 살기 시작했으며 1950년 6. 25사변 당시 황해도 피난민 200여 가구가 살면서 산신제, 풍어제 등을 지냈다. 오도항은 1920년대부터 똑대기(정기여객선, 汽船)가 인천으로 다니면서 당진의 관문역할을 하였다.

여객선은 매일 교대로 1회씩 운항했었다. 당진항은 공사비 5천원을 들여 1932년에 계선장)이 기공되어 1934년 준공되고 이승구 당진군수 덩시 당진읍에서 오섬으로 통하는 도로가 크게 개수되고 그 후 3등 도로로 승격하였다.








오도(烏島)는 큰오섬(大鰲島) 59번지가 임야로 섬의 약 5/6이고 산 120번지 전(田)이 섬의 약 1/6정도이고 작은 오섬(小鰲島)은 산 60번지 섬 전체가 임야이다. 이 오섬이 1924년(소화 8년) 당산리 거미기 동네와 둑을 막아 육지가 되었다.


그 당시 이 오섬에는 김용근이라는 사람네 집 가구가 살았는데 그는 나루질하였다. 이 섬에도 그의 아버지가 최초로 와서 살았다고 한다.
1946년도 당시 30가구였고 1950년 6. 25사변 당시 황해도 피난민들 특히 옹진군 피난민이 선박을 타고 이곳으로 정착해 200여 가구가 촘촘히 살았다. 1960년대 황해도 피난민들이 인천으로 옮기면서 줄었다.


오도항은 1920년대부터 똑대기(정기여객선, 汽船)가 인천으로 다니면서 활성화되었는데 당시 인천에서 당진 각 해안포구로 다녀 당진의 관문역할을 하였다. 정기 여객선은 큰 오섬에 댔는데 조운호와 신흥호, 한성호, 칠복호, 풍천호 등이었다.

당시 여객선은 100여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으나 보통 70~80명 적게는 15~30명이 탔었다. 여객선은 매일 인천으로 밀물시, 즉 바닷물이 거의 만조 될 때 들어왔다가 떠나고, 인천항에서도 사람과 화물을 싣고 오도항에 도착하면 조수(潮水)가 거의 만조가 되었다.


이렇게 2척의 정기여객선이 매일 교대로 1회씩 운항했었다. 당진축항준공기념비(唐津築港竣工記念碑)에 의하면 당진번영회와 지방일반민이 항구 축성을 요청해 당시 충청남도지사인 유진순(兪鎭淳)이 보조금을 교부하고 지방민과 인천부 유지에 원조로 공사비 5천원을 들여 1932년에 계선장(繫船場)이 기공되어 1934년 준공되고 1935년 5월 준공기념비가 세워졌다.


당진읍에서 오섬으로 통하는 도로는 당시 이승구 당진군수에 의해 크게 개수했고 1934년 3월 계선장과 함께 그 시설이 완성되었다. 그 후 후임 오까사끼데스로 지사에 의하여 도로를 3등도로로 승격하고 항구이름을 「당진항((唐津港)」으로 명명하였으며 이에 그 준공기념비를 세워 영구히 그 덕을 칭송한 것이다.


오도항에서는 쌀, 벼, 잡곡 등의 화물이 반출되고 청어, 동태, 마른북어, 석유, 양잿물, 정종, 소주, 광목 등이 유입되었다.


이곳에는 여관과 음식점, 상점 등이 운영되었는데 간판없는 여관, 음식점이 운영되고 상점은 5~6개 있었다.
주점(酒店)은 7~8개 정도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사건도 생기고 하여 경찰관 1명이 항시 파견되었고 여객선·어선·화물선 화물을 싣고 내리는 하역 작업이 매일같이 이루어져 인부도 20여명이 매일 일을 하였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서 자염도 했다. 뻘에 소금을 굽기 위해 소로 개흙을 갈아 흙 말리기를 반복하여 그 흙을 보릿짚, 밀짚을 넣고 긁어모아 섯자락을 만든다. 소금 굽는 장소를 만들어 소나무를 쪄다 소금을 가을부터 다음 해 2월이나 3월까지 구웠다. 소금 굽기는 1924년까지 당산리 굼벙골, 고대면 용두리 등과 같이 했다.

① 오섬 산신제

이곳의 산신제는 1946년부터 생기복덕을 가려 운이 닿는 사람과 보조자 1명을 뽑아 큰 오섬에서 지냈다. 3일간은 밖에 출입도 않고 목욕재배하고 정월 초 3일이나 5일에 날을 잡아 한밤중에 지냈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축문을 읽고 소지를 올렸다. 이렇게 다 지낸 다음 음식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 나누어 먹었다.


이 제의는 1991년도까지 산신께 동네가 잘 되길 기원하였다. 제비는 쌀을 걷거나 돈을 걷어 밤, 대추, 북에(북어), 돼지머리, 뫼를 지어 지냈다.

② 풍어제

6.25사변 후 황해도에서 배로 피난 온 사람들이 지냈다. 한 배에 보통 9명씩 중선 30여척 200여 가구가 와서 10년 정도 거주했다. 풍어제는 이때부터 임시로 포장을 치고 무당 대여섯을 불러다 지냈다.


굿은 통돼지를 잡고 주야로 7일간 했는데 작두도 탔다. 이들은 주로 민어, 조기, 새우를 잡았는데 10년 정도 이렇게 지냈다.

③ 오도 산이 터진 이야기

송산면 당산리 오도에는 산이 터진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치돌이라는 데와 오도라 하는 데가 붙어 있었었다. 그 곳에 큰 부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와서 목탁을 뚜드리며 시주를 해 달라고 하였단다.

그러니까 부자가
“아니 시준지 뭔지 정신없다. 손끝에 물이 안 말러 사는 것 같지도 않구.”
그러니 그 스님이 “그라면 그거 아주 쉽게 손끝에 물을 말릴 수가 있소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 좀 가르쳐 주쇼.”라고 하니 “당신 바로 뒤에 있는 그 산을 호미루 갯적갯적 하면 됩니다.”
라구 그러더란다. 그래서 그 여자가 틈만 있으면 거기루 가서 호미루 갯적갯적 하였다.

갯적갯적 하니까 그 물이 많이 들어올 때, 그곳으로 조끔씩 조끔씩 물이 넘었다. 그렇게 가끔 가서 파고파고 하니까 자꾸 그곳이 팽겨 나중에는 도저히 뭘로 막을 수 없을 만큼 자꾸 팽겨 완전히 골이 파졌다.

그래서 그 붙은 산이 완전히 분리되어 섬으로 변했다. 그래서 그 집은 망했고 손끝에 물이 마를 수가 있었다. 이제 그곳으로 곧바로 뚫려 거기가 팽기고 이쪽에는 자연히 흙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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