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한 형 ‘압둘 와합’의 나라, 시리아

송승주 기자(원당초6) thdtmdwn06@naver.com
송승주 기자(원당초6) thdtmdwn06@naver.com

인권에 대해 배우고 고민하면서 지금 내전 중인 나라, 시리아는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나와 친한 형 압둘 와합을 우리 반에 초대했다. 압둘와합은 우리나라에 유학온 시리아인 1호다. 유학을 오고 얼마 안 있다가 내전이 시작돼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헬프시리아라는 단체의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다가 만나게 되어 지금까지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압둘 와합이 우리 교실에 진짜로 들어 올 땐 좀 믿기지가 않았다. 형은 친절하고 진지하게 시리아의 문화, 음식 등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리아의 전통 집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의 한옥을 예로 들어 주어 이해기 쉬웠다. 시리아는 우리나라와 같이 사계절이 있는 나라라고 한다. 사막이 있고 사람들은 낙타를 타고 다닐 거란 막연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시리아의 도시는 우리의 도시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많고, 차들도 많다. 형이 들려준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에서 나는 시리아의 건축물에 마음을 뺏겼다. 로마시대의 건축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에 놀랐다. 반 친구들과 함께 듣는 시리아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나라였다.

이런 시리아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과 러시아가 끼어들면서 시리아 내전은 8년째 이어지고 있다. 민간인들은 더 많이 다치고 가족을 잃었으며 시리아를 떠나기 시작했다. 압둘와합은 정말 기본적으로 필요한 아주 적은 물건을 챙겨 집을 떠나는 한 남자아이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내가 1박 2일 놀러 갈 때 챙겨가는 짐보다도 더 적은 물건을 보면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사는구나 생각했다.

난민촌의 아이들은 칠판도 없고 책상도 없는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비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꿈이 있었다. 어떤 여자 아이는 좋은 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고 어떤 남자 아이는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이들이 하루 빨리 평화를 찾아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전쟁의 아픔을 평화와 인권으로... 노근리 어둠을 딛고 인권을 말하다

이다은 기자(계성초5) blessme0508@naver.com
이다은 기자(계성초5) blessme0508@naver.com

산으로 둘러싸인 충북 영동의 작은 마을 노근리, 조용하기만 한 그곳에 7월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달이다. 가족과 이웃을 눈앞에서 잃은 사람들은 그 뜨거웠던 1950년의 여름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볕이 따갑던 6월 21일 노근리 평화기념관을 찾았다. 노근리 마을은 6.25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평화로워보였다. 평화기념관에는 노근리 사건에 관한 영상이 상영 중이고, 6.25 전쟁에 대한 자료들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1950년 6.25 전쟁 초기 남쪽으로 거세게 밀고 내려온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고 영동지역까지 들어오자 후퇴하던 미군은 노근리 부근 마을 사람들  500여 명을 모아 피난길에 나서게 된다. 뜨거운 여름 긴 시간을 걸어온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고, 노인들은 지쳐갔다. 피난을 떠난 지 얼마 뒤인 7월 25일 노근리 철도 위로 피난민을 몰던 미군들은 사람들의 짐을 풀어 하나씩 수색을 하기 시작했다. 북한군 병력이 숨어들어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뒤, 미국 비행기가 사람들 위를 맴돌았다. “쾅~ 콰앙” 하늘에서 폭탄과 총알이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철도 밑으로 떨어졌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흘린 피가 철도를 물들였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총탄을 피해 쌍굴다리 안으로 숨어들었지만 비극은 계속됐다. 그들은 죽은 시체를 쌓아 총알을 막아야 했고,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은 곧 피였다. 72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총격에 살아남은 피난민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3년에 걸친 전쟁은 휴전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노근리 사람들의 아픈 기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이 겪은 전쟁의 아픔을 평화와 인권이란 새로운 가치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적과 나로 갈라진 이념이 전쟁을 만들어 낸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이념은 평화로 이어진다는 걸 알리려는 듯하다.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 박혀있는 쌍굴다리를 지나 철길을 오르며 들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었다. 평화와 인권은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위령탑 앞에 꽃을 놓았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를 만나다

요즘 제주도에 머무는 예멘인들을 둘러싸고 난민 보호에 관련된 찬반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다. 한국은 1991년 유엔 난민지위 협약에 가입한 뒤 2013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도입한 나라지만 여전히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다. 기자단은 지난 6월 7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공익법센터 <어필>을 찾았다. 그곳에서 난민의 고통을 함께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30대의 ‘난민의 아버지’ 이일 변호사를 만났다. 자신의 일에 항상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친절했고, 진지했으며,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Q. 공익법센터 어필은 어떤 일을 하나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어필>은 한국에 있는 네다섯 개 정도의 공익변호사 전문 그룹 중에 한 곳으로, 모두 5가지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난민이라고 해서 자기 나라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게 있고, 억울하게 갇혀 있는 외국인을 도와주는 일도 합니다. 또 염전노예 사건 혹시 아시나요?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도와주는 일이 있고요.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어느 나라 국민도 아닌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 우리나라 기업이 외국에 나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노동착취 하는지 감시하는 등의 일을 하는데요. 이런 다섯 가지 일을 다섯 명의 변호사들이 600여명의 후원자들의 후원을 받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Q. 난민들을 돕고 있으신데 <인권>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어떤 걸까요?
 
제가 난민들을 변호하면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근대 국가에서의 인권이 국적하고 연관이 많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의 헌법도 보면 인간의 권리가 아닌 국민의 권리로 되어 있어요. 인간이 어떤 국가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인권을 갖고 있는 건데 마치 어떤 국가에 속해서 그 국가의 국민이 되지 않으면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을 많이 하죠. 실제로 사람들도 그런 패러다임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인간의 권리로서의 인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 하면 국가가 권리를 부여해주는 것처럼 생각하다보니까요. 사람들이 예를 들어 외국인을 생각할 때 ‘너희들은 세금도 안 내고 군대도 안 가는데 너희가 무슨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를 해! 니네 나라로 돌아가’ 라는 발상도 나오고요. 제 생각에 인권은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반대급부 없이 그냥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점을 계속해서 붙잡지 않으면 국가와 너무 결부되어서 인간으로서 자존의 권리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Q.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소수자로서의 인권’의 측면에서 <난민>을 생각하자면 옆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건 ‘여기에 그런 사람이 있고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으로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옆에서 계속 내주는 일이 되겠죠. 예를 들어 학교에서 왕따가 일어났어요. 왕따가 된 친구를 돕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 그 친구의 친구가 되어주는 거예요. 소수자의 인권은 어떤 요소가 있냐면 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지켜야 할 대상으로서의 국가, 혹은 인권의 일부 요소들이 잘 보장될 수 있도록 제공해주는 국가가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그 존재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장애인들이 요구를 해요. ‘이동권을 보장하라’, ‘고속버스를 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사방이 모두 벽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적당히 있지’, ‘큰소리 안냈으면 좋겠다’ ‘다 아는데 그냥 감수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없는 듯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난민의 인권을 보장해야 된다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해요. ‘전쟁 나고 딱하긴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도와줘야 할 것도 아닌데 그냥 적당히 살지’, ‘눈에 안보였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이 인권이 보호받아야 할 때 마주하는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왕따 친구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처럼 ‘이들도 똑같은 사람이고 한국에서 나와 같이 살아갈 사람이다’ 라는 걸 우리 시민들이 같이 이야기 하고 친구가 되어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인권 지킴이 캠페인 하던 날

민세빈 기자(계성초5) msb7596@naver.com
민세빈 기자(계성초5) msb7596@naver.com

올 여름 들어 가장 덥다는 지난 일요일 오후, 우리들은 인권 지킴이 캠페인을 위해 대덕동 수변공원에 모였다. 인권과 관련해 활동했던 모습들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일상 속에서 쉽게 내뱉는 인권침해의 말, 여러 보장받아 마땅한 권리들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시급한가에 대한 스티커 붙이기 그리고 전쟁과 평화 이야기를 준비했다. 흥미를 끌기 위한 페이스페인팅과 나뭇잎에 인권다짐을 적어보는 체험활동도 곁들였다.

홍보판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부분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넘지 못하는 벽이나 이룰 수 없는 간절한 일들 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더 열심히 알려나가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친구들과 역할을 나누고 준비를 하는 사이 인권존중 확인서에 서명도 했다. “나는 다름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내 이름 석 자를 적고 나니 정말로 책임감이 더 들고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 어필의 이일 변호사 인터뷰, 헬프시리아 사무국장 압둘 와합의 수업, 난민 이야기, 당진시다문화가족센터 방문 등의 활동을 이어오면서 우리가 느끼지 못한 차별이 칼이나 총보다 더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상대의 아픔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존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처럼 누구나 존중받아야할 권리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당진 또한 어느 누구도 차별 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인권을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행복한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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