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승동교회 전경사진
승동교회 전경사진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박쾌인이 일제에 체포된 진짜 이유는 3.1혁명의 또 다른 주역이던 학생조직 활동에 박쾌인이 경성고보를 대표하여 참가한 주동자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학생조직은 3월1일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3월5일에는 오늘날의 서울역인 남대문역 시위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3월5일 남대문역 시위는 3.1혁명 당시 경성에서 벌어진 만세시위 중 가장 대규모 시위였으며,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시위로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대규모 시위가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벌어지게 되자 일제 당국은 관련자들인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어찌나 많은 학생들을 잡아들였는지 시위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진술만 있으면 일시적이고 우연히 참여했던 학생들까지 가리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훈계하여 방면할 대상에 불과했던 일시적 참여자들까지 잡아들여 처벌했던 이유는 학생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 만세시위가 확대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단기적 목적이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학생들로 하여금 다시는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할 목적에서 이루어진 가혹한 조치였다. 이러한 일제의 잔혹한 조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실제로 수많은 학생들이 3.1혁명에 참여한 이후 조사과정에서 스스로 자기 검열을 통해 순화된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였고 이후에도 그렇게 살았다. 반면에 일제의 이런 악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학생들이 3.1혁명을 통해 얻은 체험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한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1900년을 전후한 세대였던 것은 바로 이들이 3.1혁명을 체험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많은 학생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을 가했으니 박쾌인이 학생조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박쾌인이 경성고보 학생조직의 주요 책임자였음이 밝혀지면서 4월2일에는 당진에 귀향해 있던 박쾌인을 체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에 체포된 박쾌인은 곧바로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박쾌인을 조사한 일제의 신문조서에는 박쾌인이 3.1혁명에 참여하게 된 과정과 활동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박쾌인은 신문조서에서 일제 검사가 경성고보의 학생대표인 김극평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하자 그 관계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하지만 김원벽, 김극평, 박노영, 장채극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주변 학생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음이 진술 과정에서 드러났다. 처음에는 단순참여에 불과하다고 버텼지만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모진 고문이나 회유가 뒤따랐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일제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경성고보 3학년이던 박쾌인은 학생조직에서 활동하게 된 시기를 1919년 2월10일경부터였다고 진술하였다. 박쾌인은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장채극을 만나면서 학생조직에 참가하게 되었다. 장채극이 독립운동을 위해 함께할 사상가를 찾던 중 박쾌인과 같은 하숙집에 있던 김철수(金哲秀, 보성고등보통학교 4년생)를 통해 박쾌인을 만나게 되었다. 장채극은 박쾌인을 만나 “요즘 파리 강화담판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고 있으며, 여하한 약소국이라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문지상에도 나오고 있으니 그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시위운동을 하고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 거기에 참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로 박쾌인에게 독립운동에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다. 박쾌인은 이 말을 듣고 공감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경성고보의 학생대표인 김극평, 박노영을 만나고 승동교회에서 학생대표인 세브란스의전 김원벽을 만나게 되면서 3.1혁명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박쾌인을 학생조직으로 이끈 장채극은 박쾌인과 같은 1898생으로 후일 서울파 사회주의 그룹의 핵심 활동가가 되었던 인물이고, 김극평은 경기고보 4학년으로 경기고보 학생조직의 대표 역할을 하였고, 박노영은 박쾌인과 같은 3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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