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박쾌인의 출신지는 당진면 읍내리 54번지로 현재 당진1동 사무소 주변으로 당진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사진은 옛 당진경찰서 전경=사진제공 당진시청
박쾌인의 출신지는 당진면 읍내리 54번지로 현재 당진1동 사무소 주변으로 당진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사진은 옛 당진경찰서 전경=사진제공 당진시청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박쾌인(朴快仁)은 1898년 생으로 당진면 읍내리 54번지 출신이다. 당진면 읍내리 54번지는 현재 당진1동 사무소 주변으로 당진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박쾌인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기록에 자세히 남아 있는데 3.1혁명 당시 당진에서 경성에 유학온 재경 유학생이었다. 박쾌인이 다녔던 경성고보는 구한말 설립된 관립중학교로 일제가 조선인 교육을 외면하면서 당시에는 조선인을 위한 최고의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따라서 박쾌인은 당시 조선을 통 털어서 장래가 촉망되던 학생들만 다닌다던 경성고보에 재학 중이던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박쾌인이 3.1혁명에 참여하였을 당시 나이는 22세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22살의 나이에 경성고보를 다녔던 것이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 늦게 학교를 다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 시기에는 대부분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20세를 전후한 나이였다. 오늘날의 대학생과 비슷한 정도였던 것이다.

박쾌인은 경성고보를 다니면서 학비는 매월 아버지로부터 15원을 송금 받아 경성 송현동 56번지에서 하숙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박쾌인은 경성고보를 다니면서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던 유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쾌인의 아버지는 당진에서 일정한 정도의 재력을 갖추고 있었고, 자식의 교육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살았던 지역 유지였던 것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박쾌인의 아버지가 경성에서 3.1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상경하여 박쾌인을 데리고 당진으로 귀향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박쾌인 신문조서에 의하면 박쾌인은 3월1일 파고다 공원에서 전개된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시위대와 함께 경성시내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3월4일 상경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들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상경한 아버지로써는 이 말을 듣고 자식의 장래가 걱정되었는지 박쾌인을 당장 귀향시키려 하였다. 그렇게 박쾌인은 아버지에 이끌려 다음날인 3월5일 당진으로 귀향하였다. 그만큼 박쾌인의 아버지는 신속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즉각 경성에 달려갈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진으로 귀향해 있던 박쾌인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한 달 만에 다시 경성에 가게 된다. 박쾌인이 3.1혁명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일제경찰이 체포한 것이다. 박쾌인의 체포는 그가 귀향한 이후 한 달 가량이 지난 4월2일의 일이었다. 박쾌인이 귀향한 이후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제의 신문조서에 의하면 박쾌인은 아버지에 이끌려 귀향한 이후 오르지 집에만 머물러 있었고, 주변사람들이 집에 찾아와 경성에서 벌어진 3.1만세 시위에 관해 물었지만 집이 당진경찰서 옆에 있어 당진경찰서장으로부터 직접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고 발뺌하였다. 하지만 박쾌인의 이러한 진술은 모두 믿을 수 없다. 자신이 3.1혁명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고분고분 진술할 사람이 세상에 없을 것임을 고려하면 이 말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 진술일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박쾌인은 체포된 이후 조사과정에서 3월1일 시위에 참석한 것은 모두 인정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아버지가 상경하여 귀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마치 우연하고 단순하게 일회성으로 집회에 참석하였다는 주장이다. 박쾌인의 이런 진술대로라면 아무리 악독한 일제 경찰이라고 해도 훈방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제경찰이 귀향해 있던 그를 체포해 경성으로 압송했던 이유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박쾌인이 3.1혁명에 연루된 혐의가 구체적으로 포착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박쾌인에게 당진에서의 활동에 대해 집중 추궁했던 것은 3.1혁명에 가담한 학생조직의 주요 주동자 중 한명인 박쾌인이 귀향한 이후 당진지역의 만세 시위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거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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