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을 기록하고 널리 알린 정미 출신 이종린Ⅳ
3.1혁명을 기록하고 널리 알린 정미 출신 이종린Ⅳ
  •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승인 2018.05.28 11:09
  • 호수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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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이종린의 묘소와 비석
이종린의 묘소와 비석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천도교도로써 이종린은 천도교 내 신구파 대립 과정에서 구파를 대표하는 종교인으로 활동하였다. 천도교 신구파의 대립과 갈등은 손병희가 투옥된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발생하였다. 손병희 사망 후 천도교는 박인호가 도통을 계승하였는데 박인호의 도통을 인정하지 않는 최린 등이 신파를 구성하면서 구파와 대립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천도교 내의 신구파 대립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우선 최린을 비롯한 신파를 친일세력으로 포섭하였다. 반면 천도교 구파는 일제에 저항하면서 멸왜기도운동을 조직하는 등 일제와 맞섰다. 이종린은 천도교 구파로 1930년대에 들어 천도교에서 장로 등 주요 직책을 수행하였다. 조선교육협회 이사, 여자고학생상조회 후원회원, 조선과학지식보급회 임원, 조선어표준사정위원회 위원 등도 역임하였다.

이렇듯 언론인으로 천도교를 대표한 종교인으로 일제에 저항하던 이종린은 수많은 친일인사들이 그랬듯이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전시 동원체제에 협조하면서 친일행위를 시작하였다. 이종린의 친일행위를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을 시작으로 국민총력천도교연맹 이사장, 흥아보국단 경기도 준비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준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 발기인, 상무이사, 지원병보급설전대 강사,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 천도교위원, 국민동원총진회 이사, 국민동지회 발기인,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이종린은 일제가 전시동원체제를 위해 조직한 각종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친일행위를 이어갔다. 1940년에는 천도교의 최고위직인 교령(敎領)에 이어 장로(長老)가 되어 종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천도교 교령에 취임한 후에는 일제가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는 구호인 팔굉일우(八宏一宇)의 신념으로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특히 이종린은 일제강점기 안창호, 여운형과 함께 조선 3대 웅변가로 불릴만큼 언변이 뛰어났다. 일제강점기 안창호, 여운형과 함께 웅변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일제에 저항하던 이종린이 자신의 재능인 웅변과 문장으로 일제에 부역하자고 역설했으니 그 효과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이종린의 묘소와 비석
이종린의 묘소와 비석

광복 후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자리가 3.1혁명의 주역 중 한사람이던 이종린에게 어울리는 자리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937년 이후 보여준 이종린의 행적을 감안한다면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종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은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조직적 방해에 부딪치면서 재판 결과는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수많은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이 그렇듯이 이종린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이후 이종린은 1948년 정부수립에 즈음하여 서산갑구를 지역구로 제헌국회에 진출하여 헌법기초위원, 교육체신위원장, 외무·국방위원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이어 1950년 5·30총선에서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총선 후 곧이어 터진 6·25전쟁으로 한강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서울에 남겨진 이종린은 북한군에 체포되었다. 인민군은 이종린을 수감하였지만 옥중에서 병이 생기자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는지 가출옥시켰다. 출옥 후 이종린은 곧 병사하였다.

이종린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뛰어난 문장과 언변을 타고난 걸출한 인물이었다. 또한 일생을 살면서 자신의 재능을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그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한 때는 민족의 희망이 되어 환호도 받았지만 때로는 반민족 행위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 모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일생을 통해 세운 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공을 바탕으로 형성된 대중적 명성을 반민족 친일행위에 썼다는 측면에서 그의 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평생을 살면서 한 방향으로 살아간 올 곧음에 미치지 못했음이다.

3.1혁명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정미면 출신의 이종린을 조명하면서 무거운 마음을 거둘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