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독립신문』은 1919년 3월1일 오전 9시에 이종린에 의해 원고가 완성되어 보성사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이렇게 1만부가 인쇄된 『조선독립신문』은 학생들을 통해 경성시내 곳곳에 배포되었다. 『조선독립신문』이라는 제호는 이종린이 직접 지어 정한 것이고, 기사 원고 역시 모두 이종린이 작성하여 신문을 제작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이종린이 이종일에게 대중에 널리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 3월1일 아침의 일이었다. 그런데 당일 아침 부탁을 받고 어떻게 잠깐 사이에 『조선독립신문』라는 제호를 짓고, 원고를 써서 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는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종린이란 탁월한 문장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니 이종린의 문장을 당대 최고 중 하나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닌 것이다.

『조선독립신문』 기사의 내용은 세 가지로 되어 있었다. 첫째는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3월1일 하오 2시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민족대표들의 순국결사(殉國決死)의 뜻을 밝혔으며, 셋째는 독립운동이 적극적으로 확대될 것임을 전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 독립선언의 주모자인 33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3월1일 오전 9시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전이었는데 어떻게 현재 일어나지 않은 사실인 33인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쓸 수 있었을까 의문스런 대목이다. 일제도 이를 수상히 여겨 집중적으로 신문하였는데 지도부가 독립선언을 하고 종로경찰서에 붙잡힐 계획이란 것을 이종일이 이종린과 공유하였으며, 이런 소식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제작된 『조선독립신문』이 경성시내에 나돌자 수많은 조선 민중들은 『조선독립신문』을 통해 3.1혁명의 진행 과정과 확산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3.1혁명에 함께하면서 조선이 독립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독립신문』을 통해 3.1혁명이 전파되고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3.1혁명으로 구속된 인사들의 신문조서를 살펴보면 『조선독립신문』을 보았는지를 확인하고 『조선독립신문』을 보았거나 소지하고 있으면 주동자로 보고 집중 취조했다. 일제가 『조선독립신문』의 존재를 얼마나 크게 의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일제는 『조선독립신문』과 관계된 인사들을 신속히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33인의 한 사람인 이종일은 태화관에서 붙잡혔고, 발행인으로 올라 있던 윤익선은 그날 하오 6시에 붙잡혔으며, 인쇄소인 보성사는 폐쇄당하였다. 그러나 『조선독립신문』을 제작했던 장본인인 이종린은 몸을 피하여 체포를 면하였고, 관훈동 경성서적조합 사무소에서 장종건 등과 함께 등사판 신문을 계속 발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독립신문』은 이종린에 의해 제2∼4호까지 직접 손으로 제작한 프린트판으로 발간할 수 있었다. 이종린이 체포된 것은 3월10일의 일이다. 하지만 이종린이 체포된 이후에도 『조선독립신문』은 계속해서 발행되었다. 이종린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자 함께 일했던 장종건이 광화문통에 있는 유병윤의 집으로 옮겨 계속 제6호까지 발행하였고, 25일 장종건, 최치환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되자 제9호부터는 이용설, 강매 등과 무명의 후계자들이 계속 나타나 신문을 발행하였다. 『조선독립신문』이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 언제 중단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3.1혁명의 소식을 전하고 널리 알려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3.1혁명에서 『조선독립신문』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렇듯 이종린에 의해 시작된 『조선독립신문』의 존재는 3.1혁명사에서 기념비적인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이종린이 시작하였고, 『조선독립신문』이 지하에서 계속 발행되면서 3.1혁명은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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