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렇게 독립만세시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자 일제의 대응 방식도 점차 강화되었다. 일제가 동원한 군과 경찰은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로 진압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 중에 총 맞아 죽었고, 체포되는 과정에서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으며, 고문과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관순 열사로 유명한 천안 아우내 만세시위이고,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단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시골마을 주민들을 일본군이 출동하여 총격을 가하고 교회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인 사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라는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에 의해 전세계에 알려졌다. 동시에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만세 시위의 양상은 4월 이후에도 변함없이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시위방식이 한밤중 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는 시위였다. 이것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뜻을 펼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군중도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하지만 일제는 한밤중 불놀이 하듯 독립의지를 표현한 작은 시위까지 참여자를 찾아내 가혹하게 태형을 가했다.

이렇듯 3.1혁명 참가자는 남녀가 따로 없었고, 노소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귀천의 차이가 없었다. 대전 인동에서는 나무꾼이 앞장서고, 평양에서는 기생도 함께하였으며, 진주에서는 걸인들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3.1혁명은 33인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발표를 계기로 시작되었지만 수많은 학생들과 민중이 함께하였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혁명에 참여한 시위인원을 약 200여 만 명으로 보고, 그 중 45,306명이 체포되었고,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850명이 부상당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의하더라도 1919년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집회참여 인원은 충남 4만 명을 포함하여 총 46만 3,086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3.1혁명은 역사적으로 대한민국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출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수립 과정은 국내에서 3.1혁명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경성에서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자 현순과 최창식을 상해로 보냈다. 상해에 도착한 이들은 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고, 『The China Press』를 비롯한 신문에 조선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보도하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3·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3월 17일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에서는 4월23일까지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한성정부 등을, 길림에서는 고려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렇듯 국내외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한편으로 단일한 계통으로 독립운동을 이끌 조직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 미주, 중국, 연해주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천여명이 상해로 모여 들었다. 회의가 열리자 조소앙은 회의의 명칭을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3.1혁명 정신을 이어받는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건립된 것이다. 그 때가 바로 1919년 4월 11일의 일이다. 이렇듯 3.1혁명의 결과는 자주독립 의지를 모아내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기 위한 지속적인 독립투쟁을 이어 갈 수 있었고, 마침내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 처음에는 3.1혁명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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