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 준 (朴哲濬) (예) 공군대령

광해군의 외교와 정묘호란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
한편, 1619년 후금의 누루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이 밀명을 받은 강홍립은 화살촉을 빼고 활을 쏘게 하는 등 명의 편에 섰다. 명나라의 모문룡이 패주하자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여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였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후금과 화의를 맺도록 하는 등 실리적인 이중적 중립 외교를 폈다. 광해군은 조선역사상 손가락에 꼽는 외교의 권위자라고 볼수 있다.


1627년(인조 5) 중국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을 정묘호란이라 부른다.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 원인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의 친명배금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정책의 충돌에 있었다.


광해군은 외교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명·청교체기의 새로운 국제정세에 현명한 외교정책으로 대응해 충돌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인조 즉위 후의 집권세력인 서인은 광해군 때의 대외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요동을 수복하려는 명나라 장군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조선과의 경제교류가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이 발생하자 무력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


한편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은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실패한 후 그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면서 조선의 병력이 약함을 강조하면서 정벌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아민으로 하여금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고, 주력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뒤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방면으로 남하하여 평양을 거쳐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하였다.


화전의 양론이 분분하던 중 후금이 강화를 제의해 오자 최명길 등의 주화론을 채택, 후금과 교섭하여 정묘약조를 체결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후금군은 평산이남으로 더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할 것이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화약은 두 나라 다 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관계가 굴욕적인 데다가 막대한 세폐와 수시로 요구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으로 더욱 배금의 길을 걷게 되었다.


후금도 경제적 이익은 취할 수 있었으나 모문룡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에 더욱 팽창된 후금이 조선에 대한 강압적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어 결국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국민적 항전이 이어진 선조대의 왜란과 달리, 후금과 맞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의 전세는 파죽지세 일파만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수가 있다. 눈물겨운 항전이 있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성을 폭파해 옥쇄한 정묘호란 최초의 전투 안주성 싸움의 주역 남이흥 장군이다.


광해군 폐위와 인조반정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쟁으로 국력이 약해져 임진왜란 같은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고 판단하고, 당쟁을 폐지해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우선 병력을 확보해 국방을 강화하고 신흥강국인 후금과 명제국의 공방전에서 중립을 지켜 조선의 입지를 마련하는 등 대내외적인 치적도 쌓았다.


그러나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의 농간에 휘말려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형인 임해군과 14세의 아우【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 있는 안주성벽】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패륜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때 대북파의 탄압을 받아 몰락하게 된 서인 이규, 김류, 이괄 등은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왕위에 옹립했다.
이름하여 ‘인조반정’이다.


반정에 참여한 이괄은 무신으로 용맹과 지략이 당대에 빛나는 존재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그는 장수감으로 촉망 받는 인재였기에, 거사의 주모자들에게는 반드시 포섭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함길도 병사로 떠나려던 이괄에게 거사 계획을 털어놓고 가담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괄 또한 간신들의 폭정에 의분을 품었던 터라 가담을 결심한다.
중견 장교들에게 신망과 존경을 받아오던 이괄은 군관 20여 명을 포섭해 반정군 부대 편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근 고을의 병력을 끌어들인 것도 그의 공로였다. 그러나 막상 반정이 성공하고 나서 진행된 논공행상은 뜻밖이었다.


1등 공신으로 책정되어야 마땅할 이괄에게 2등 공신이 주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후금국의 힘이 강대해지면서 관서지방을 염려한 조정에서는 이괄을 평안병사로 임명해 영변에 부임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불만이 누적된 이괄은 결국 특단의 결정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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