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자가 선정된 이후 독립선언서는 3월1일에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를 언제 발표할 것인가를 두고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고종의 국상을 보기 위해 경성에 상경할 것임을 고려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고종의 국상일인 3월3일을 발표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상이 진행되는 3월3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 불경스럽다고 비난 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아 다른 날을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3월2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은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이는 날로 독립선언에 함께하기로 한 기독교 측이 참여하기가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결국 이런 점을 고려하여 독립선언식을 3월1일 오후2시 파고다공원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1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한 이후 모든 일은 3월1일에 맞춰 준비하였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한용운이 공약3장을 지어 더하여 완성하였고, 천도교 월보 편집장이던 이종일을 통해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이종일은 독립선언서를 발간하면서 일반 민중이 읽고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 선전물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고 이종린을 통해 “조선독립신문”이란 제호의 대중 선전물을 별도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총 2만여장으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조직을 통해 전국에 배포하기로 하였으며,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3월1일 오후 2시에 맞추어 발표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3월1일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당일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3월1일 오후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했던 계획을 변경하기로 한 것이다. 장소도 고급 음식점으로 유명했던 태화관(명월관지점)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발표 장소를 변경한 이유는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어 과격한 시위로 발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일제의 신문조서에서 “학생들이 다수 있으면 소동을 일으켜, 도리어 유해할 것이니 다수의 앞에서 선언서를 발표하지 않더라도 배포하면 지장이 없으므로 명월관지점에서 발표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방향을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일제에 독립을 요청하는 평화로운 청원운동으로 기획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독립선언에 고무된 학생들이 과격한 행동으로 격한 시위가 이어진다면 이것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은 지방에서 참석하지 못한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한용운이 대표로 독립운동을 역설하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미리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스스로 연행 당하였다. 이렇게 스스로 신고하여 연행된 것은 독립선언 이후 일제가 반드시 체포할 것으로 보았기에 비굴하게 끌려가느니 당당하게 제발로 걸어가 일제 경찰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사전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학생대표들은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를 기다리다 깜짝 놀라 태화관으로 달려갔다.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에게 파고다 공원으로 가야한다고 위협적으로 요구하였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로써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은 민족대표가 없는 가운데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독립선언서 낭독은 민족대표를 대신해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파고다 공원 여기저기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과 군중들은 이제 조선이 독립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가두시위행진이 이어지는 동안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때마침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민중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시위대는 경성 시내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행진하였다. 이렇게 이어진 시위대의 만세행렬은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그리고 ‘공약삼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만세시위는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으로 이어졌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