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나루문학상 수상작
사강 이진복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천마산이라는 등산하기 좋은 낮은 산이 있다. 장마가 끝나고 연일 폭염주의보가 계속된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다. 아파트 창문을 다 열어놓고 거실바닥에 딱 달라붙어 선풍기와 씨름하며 이리 저리 혼자 뒹굴다 나의 발길은 산으로 향했다.

여름 한철을 사는 매미는 한 겨울을 알 수가 없다. 산길을 따라 조용히 걷다보니 매미는 이 여름이 가기 전에 할 일을 다 해야겠다는 듯이 우악스럽게도 울어댄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등산객이 빠른 걸음으로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건강한 노년의 삶을 위해 셔츠가 다 젖도록 땀을 쏟아내며 걷고 있다. 나는 등에서 땀이 비칠 때 쯤 등산로 옆 벤치에 주저앉았다. 천마산 정상까지는 한참이나 남았지만 상관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볍게 호흡명상을 하며 들숨 날숨을 새긴다.

젊어 소방서에 입사하여 화재조사 업무를 십 수 년 동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논산지검에서 참고인 조사를 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처음가 본 검찰청에서 참고인 조사를 마치자 젊은 검사가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을 기소하려고 하는데 경찰이 조사한 서류는 믿지 못하겠으니 당신이 조사한 서류를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화재사고의 원인조사를 경찰이 전담하던 시절이었다. 열심히 일한 덕에 화재조사자로 충남소방에서는 나름 명성도 얻었다. 여름 한철만을 사는 매미 마냥 젊은 시절을 그렇게 우악스럽게도 보낸 것이다.

나의 삼사십 대는 목표를 지향하는 삶이었다. 글을 쓰면 문예대전에 입상을, 붓을 들면 10년 후에 개인전을 열겠다는 포부로, 등산을 하면 잘 닦여진 등산로를 버리고 길도 없는 인수봉 암벽 길을 꼭 가야만 하고, 공부를 시작하면 자격증이라도 꼭 따야한다는 목표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에만 집착하였다. 나의 삶을 더욱더 담금질하고 채찍질하며 괴롭혀 왔다. 성과와 결과에만 집착한 삶은 그 과정을 즐기기 못하고 조급증에 빠져 나뿐만 아니라 가족 그리고 주변의 직장동료들까지 힘들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만든 수개의 자격증들이 지금은 서랍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을 두 듯이 성공과 결과에만 집착한 조급증은 늘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과정은 즐기기 못하는 폐단을 낳았다.

젊음과 패기로 “세상에 안 되는 것이 어디 있어” 소리치며 두려움 없는 삶을 살았다. 세상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탐욕스런 맘을 가지고 실력만을 믿고 앞만 보고 달려온 시절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오만과 독선에 빠진 삶이었다.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에 좌절하고 분노하며 어리석은 삶을 살아온 것이다. 젊은 기개와 치기어린 열정으로 얻은 것도 있지만 탐ㆍ진ㆍ치란 삼독에 빠져 뇌를 불태우며 살아온 삶이다. 뇌가 불타는데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혜민스님의 이야기처럼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느리게 걷는다. 오늘은 목표를 잃어버린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어 걸어본다.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쉼 없이 달려온 인생 이제 멈춰서일 때이다.

내가 가야 할 목표만 바라보고 항상 들고만 살아온 얼굴을 고개 숙여 아래를 보니 큰 나무들 사이로 생명력 넘치게 자라고 있는 산야초들이 눈에 들어온다. 왜? 이제야 자기를 보아주는지 원망스럽다는 듯이 더욱더 푸르고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키 작은 벌레 먹은 멍가 나뭇잎도 아름답기만 하다. 큰 나무 밑동을 감싸고 자라는 이끼도 보인다. 혹시나 이끼 때문에 나무가 가렵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나라면 가려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큰 나무와 이끼는 상관없다는 듯이 잘 어울려 살고 있다. 그 옆에는 나무를 타고 오르는 기세 좋은 담쟁이 넝쿨도 보인다. 콩새 두 마리는 그 사이를 널뛰기를 하면 놀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걷고 있는 길엔 밤새 내린 비에 잘못 기어 나온 지렁이 한 마리가 한낮 폭염에 말라 죽어 있다. 개미떼들이 자기 몸집보다 몇 십 배나 큰 지렁이를 옮기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꼭 나의 젊은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하늘을 다 덮어버릴 듯이 기세 좋은 나뭇잎은 여름날 한낮의 폭염을 누그러트리고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햇빛은 내가 가는 산길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놓았다. 나는 왜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았는가?

사마천은 오십이 가까이 되어 ‘대분망천’이라 했다. 자신의 지나온 삶을 한마디로 후회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사기를 완성하였다. 대야를 이고 하늘을 보니 하늘이 보일 리가 없다. 나는 ‘탐ㆍ진ㆍ치’란 삼독을 머리에 이고 고개를 들어 하늘 보기를 바라니 하늘이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여름 한철을 사는 한 마리 매미처럼 그렇게 젊은 여름날을 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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