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춘 축제위원장을 통해 본 기지시줄다리기
농업·해양·상업의 복합문화, 기지시의 자부심에서 당진의 자랑으로

기지시줄다리기 축제에 쓰일 큰 줄 제작이 마무리되면서 축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와 평창 동계 올림픽과 패럴림픽을 통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아가고 있는 기지시 줄다리기. 그 성대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조성춘 축제 위원장을 통해 기지시줄다리기의 변천사를 들어봤다.

“80년대니까 내가 30대 초반부터 기지시줄다리기 축제에 참여했지. 당시에는 차가 없던 시절이니까 동네 젊은이들이 리어카로 모든 일을 다했어. 마을의 자부심이 걸린 일이니까 힘들어도 힘들단 생각도 안 하고 다들 열심히 했지”

기지시줄다리기축제위원회 조성춘 위원장(70)은 어렵게 줄다리기 축제를 하던 당시를 회상했다. 차도 없던 시절, 손으로 나르고 발로 뛰면서 줄다리기 축제를 준비하던 시절은 한창 열정적으로 일하던 자신의 청춘과 겹쳐 있는 듯 보였다.

조 위원장이 어린 시절만 해도 기지시에는 난장이 열렸다. 학교에 낼 월사금을 난장에 있던 야바위꾼에게 홀랑 날리던 친구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기지시에 열렸던 난장 문화는 기지시줄다리기가 형성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조 위원장이 기억하던 그 이전 시절부터 난장이 기지시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진시에 따르면 기지시줄다리기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존재하는데, 이중 기지시 시장이 발달하면서 내포지방의 교통 요지였던 기지시에 난장을 세우고 시장 활성화를 위해 줄다리기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기지시(機池市)라는 지명 역시 ‘줄틀을 보관하는 연못이 있는 시장마을’이라는 뜻이다.

기지시 시장이 300여 년 전부터 한 달에 장이 12번이나 섰을 정도로 호황을 이뤘던 이유는 예덕보부상이 서울로 오가던 길목에 있었던 덕이다.

난장이 호황을 이루면서 농경사회에서 작게 만들던 줄은 참여인원이 늘면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는데, 인근 안섬 지역에서 닻을 만들던 방식도 도입되면서 줄틀을 이용해 큰 줄을 만들게 된다. 다른 지역의 두 줄 꼬기 방식과 다른 당진만의 세 줄 꼬기 방식이 탄생한 배경이다.

조성춘 위원장은 “2~3년마다 돌아오는 윤년에 하던 줄다리기 축제가 2010년부터는 매년 하는 행사가 됐어. 힘들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하는걸 보니 보람도 있지”라고 말했다.

원래 줄다리기 축제가 열리던 시내권에서 이런 대형 축제를 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조 위원장. 여전히 기지시줄다리기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다가오는 축제를 준비해고 있었다.

한편 올해 기지시줄다리기 민속축제는 오는 4월 12일부터 15일까지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일원에서 펼쳐질 예정이며 수상(水上)과 수하(水下)가 겨루는 축제의 백미 줄다리기는 축제 마지막 날인 15일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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