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은 3·1혁명 100주년을 맞는 2019년까지 당진신문에 당진의 항일독립운동과 인물에 대한 연재를 시작한다. 지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항일독립운동에 관련된 당진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만나 볼 수 있다.  /편집자주

3월1일 하오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 (출처 : 독립기념관)
3월1일 하오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 (출처 : 독립기념관)

시 경성시내 종로거리 탑골공원에는 수 천 명의 인파가 모여 들었다. 이들은 탑골공원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탑골공원 중앙의 육각당 위로 한 중절모를 쓴 중년의 사내가 등장하여 무엇인가를 큰 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일제에 빼앗긴 나라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과 모든 조선인은 자주민이라는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고 탑골공원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다가 한 순간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잠시 후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박수를 치고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독립만세는 탑골공원을 나와 종로를 거쳐 남대문 의주통 영성문 앞을 지나 대한문 앞에 이르는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서 군중들은 대오를 이룬 채 서대문밖의 프랑서 영사관 앞을 지나 본정통 광화문에 이르렀다.

이렇게 시작된 3.1 만세시위는 급속하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장 평양과 의주, 원산에서는 3월1일 당일 서울과 동시에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전국 삼천리 방방골골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으며, 당진에서도 3월10일부터 만세시위가 시작됐다.

3.1혁명은 1919년 3월1일 시작되어 4월 말까지 두 달 이상 전국 경향 각지에서 전개됐다. 3.1혁명에는 신분귀천이나 남녀노소의 차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회를 엿 보다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

당시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1919년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누계 760회에 걸친 463,086명의 민중이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시위가 벌였다고 기록했다.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3.1혁명이 얼마나 처절하고 치열했는지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평화적 시위에 악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단지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얻어터지고 감옥에 갇혔다. 뿐만 아니라 만세시위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여학생의 팔을 자르는 등 잔혹한 탄압 실상을 알려주는 보도기사의 그림. (출처 : 독립기념관)
만세시위에 참가한 여학생의 팔을 자르는 등 잔혹한 탄압 실상을 알려주는 보도기사의 그림. (출처 : 독립기념관)

조선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래 해방될 때까지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투쟁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독립국가임을 선언문을 통해 발표하고 만세시위를 벌인 것은 1919년 3월1일뿐이다. 그렇다면 왜 1919년에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조선독립선언이 다른 때도 아닌 1919년 3월1일에 일어났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3.1혁명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3.1혁명의 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할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 발표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1919년 전후의 국제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계는 바야흐로 전쟁의 기운이 감돌아 유럽 제국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 1914년 7월이다. 개별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 유럽의 여러 나라가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은 5년을 끌어 오다 1918년 11월11일 종전을 고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에서 승리한 참전 연합국들은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1월부터 강화회의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했다.

전후처리 문제를 다룰 파리강화회의는 자연스럽게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국제관계를 보았을 때 파리강화회의는 식민지 조선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더욱이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했던 미국 대통령 윌슨이 국제문제를 풀어갈 방향으로 제시한 14개조항 중 제5조의 식민지에 대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세계 약소민족에게는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런 점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파리강화회의를 조선독립을 실현할 장으로 큰 기대를 걸게 하였고, 이때를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도록 했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