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 의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3.1혁명을 기념하는 3.1절 노래 가사이다. 3.1혁명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는 이 노래 가사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터지자 밀물 같았고, 우리 민족에게는 말랐던 강물처럼 한강물이 다시 흘렀으며, 백두산 더욱 드높이 솟았다. 3.1혁명으로 조선민중은 독립의지를 더욱 분명히 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나가서 3.1혁명이 있었기에 조국 독립과 민족해방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해방된 독립국가와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3.1혁명은 일제강점기이던 1919년 조선민중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역사적 대사건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1895년 이후의 조선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과 다름없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10년에는 경술년 국치로 그나마 명목만 남아있던 나라 목숨마저 송두리째 빼앗겼다. 이렇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동안 무능한 국왕과 관료들은 누구도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라를 파는데 앞장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나라 빼앗긴 책임을 무지한 백성 탓으로 돌렸다. 조선 민중 역시 나라 잃은 설움에 냉소와 패배주의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민중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았고 의병을 조직하여 일제에 저항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우다 힘에 부쳐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하면서까지 독립투쟁의 의지를 이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1919년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긴지 정확히 10년째 되는 해였다. 3.1혁명이 위대했던 것은 허무하게 나라를 빼앗기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것만 같았던 조선민중이 깨어 있었다는 것이다. 3.1혁명으로 조선민중은 스스로 놀랐고 스스로 각성하였다.   

3.1혁명은 단지 조선민중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북경대 문과대학장이던 진독수가 “3.1혁명은 세계 혁명 사상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하고, 중국인의 총궐기를 호소했다. 3.1혁명이 중국 5.4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3.1혁명은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도에서 4월5일부터 시작된 간디의 “진리수호 운동”이 3.1혁명과 같은 방식의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밖에도 필리핀과 이집트 등 전 세계 약소민족의 민족해방투쟁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니 3.1혁명의 빛나는 뜻은 그 크기를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이런 3.1혁명에 대해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조선을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라고 칭했으며, 인도의 초대 수상을 역임한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3.1혁명의 위대함을 언급하였다.

이 위대한 3.1혁명이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한국사회에서 100주년이란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켜켜이 쌓인 한해가 100번 쌓여야 비로소 10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3.1혁명과 같이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는 더욱 특별해 진다. 3.1혁명 100주년을 준비하는 지금 3.1혁명 100주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의 문제는 3.1혁명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와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1년은 3.1혁명에 깃든 정신을 정확히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은 3·1혁명 100주년을 맞는 2019년까지 당진신문에 당진의 항일독립운동과 인물에 대한 연재를 시작한다. 지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항일독립운동에 관련된 당진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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