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명 산 / 재인당진군민회 회장
■ 대담 : 이광욱 편집국장


▲ 박 명 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란 책이 한때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
이 책은 단순히 한 개인의 성공을 뛰어 넘어 세계경영이라는 글로벌 개념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다. 이후 유사한 책들이 서점가를 점령했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경영서에 손길이 갔다.


특히 미증유의 IMF 사태를 겪으면서 성공가도에 대한 열망이 넘쳐났고 로또 복권처럼 인생 역전을 꿈꾸는 한탕주의 마저 생겨났다. 지난달 29일, 제 29대 재인당진군민회 회장으로 취임한 박명산 회장(58)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볼 때 결코 서두르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자세로 걸어간 것일 뿐 성공이 아니라고 말했다.


재인당진군민회 회장 취임과 관련, 박 회장을 만나 앞으로의 군민회의 활동 방안과 운영계획에 대해서 들어봤다.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29대째 이어진 것을 보면 재인당진군민회의 활동이 대단한 것 같은데.

“재인딩진군민회만 35만명이고 연합회 성격을 띤 충청 향우회는 170만명쯤 됩니다. 예부터 당진과 인천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뱃길을 이용해 많은 이동이 있었습니다. 유학을 가더라도 당진과 인접한 예산 정도이고 천안도 극히 드물었고 거개는 인천으로 유학길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회장님도 청운에 꿈을 안고 인천 연안부두에 내렸습니까.

“고향이 석문면 초락도리 입니다. 초락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인천에 정착하게 된 것은 누이의 권유로 84년 일이고 그 전에는 부천에서 KBS 방송국에 근무했습니다. 방송국에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수리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하기는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불쑥 사직서를 내미니 윗분들이 당황했겠지요. 저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과감하게 나왔습니다. 30대 초반인데 직장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돼 가고 남 부러울 것 없었지만 어쨌든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일을 추진함에 있어 좌고우면하는 성격이 아니고 이거다 싶으면 결정을 내리고 기다립니다.”


-부천과 인천은 같은 생활권이라 할 정도로 인접해 있어 연착륙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겠습니다. 방송일을 접고 인천에서 구상한 사업은 무엇이었습니까.

“부동산 컨설팅이었습니다. 지금은 동네 부동산 간판도 컨설팅이라고 달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부동산에 대한 컨설팅 개념이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단순히 토지나 건물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와 상담하는 고객 맞춤형 부동산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사업 아이템이 신선해서 그랬는지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대박을 터트린 셈이네요. 사업을 하면 누구나 부침을 겪게 마련인 데 실패를 경험한 적은 없었습니까.

“올 겨울을 나면서 자금이 회전되지 않아 1억여원 정도 손해를 보았습니다. 물론 금전적 손실을 보면 기분이 좋을리 없지만 그것도 떠안고 가는 성격입니다. 내 그릇이 거기까지 인데 욕심을 부려볼 들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거래 당사자는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겠어요. 수중에 돈이 들어왔다고 해서 전부 내 것이 아닙니다. 어릴적부터 믿어온 기독교 모태신앙이어서인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인당진군민회로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군민회는 오래전부터 관여해 왔습니까.

“재인당진군민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지만 참여하게 된 것은 5년전부터 입니다. 재인당진군민회 소속에는 12개 읍·면민회가 소모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3년전 석문면 회장이 공석이 되는 바람에 주위의 권유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번에 240여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단독으로 추대해 군민회 회장을 맡게 된 것입니다.”


-집행부 구성부터 앞으로 군민회 활동에 주안점을 둘 사항은

“당진군민회뿐만 아니라 여타 시군을 가 보아도 노령화 되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분들이 초창기부터 군민회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한 공로는 인정을 하지만 세대간의 격차라고 해야 할까 젊은 청장년층은 군민회를 기피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시대적 흐름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의제만 가지고 입씨름을 하다보니 생산적인 군민회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집행부도 40-50대 층으로 과감하게 바꾸었습니다. 열심히 뛸 수 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임기 2년 동안 장학재단을 설립할 것입니다. 지금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기금이 넉넉하지 않아 많은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있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소난지도에 사업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팬션사업은 잘 되고 있습니까.

“제가 사회적으로 활동은 많이 하지만 마음을 터 놓고 인생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사진작가로 변신해 해외에서 전시회도 가진 이상벽씨와는 오랜 세월동안 동거동락 했습니다. 그분의 작업실도 소난지도에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벗 삼아 사진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길래 선뜻 동의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바탕이 됐겠지만 교회건립과 함께 아프리카 등 해외에서의 봉사 활동도 남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로타리클럽에서 봉사와 나눔의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무료로 학교 6개동을 건립해 주었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척교회의 경우, 부모님의 유지를 받듯는 차원에서 도움을 주곤합니다.”


-대선과 총선을 치렀지만 선거철이 돌아오면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이 쇄도하지 않습니까. 향우회의 정치적 참여는 어디까지 허용돼야 하는지 개인적 견해를 밝힌다면

“대선은 모르겠지만 이번 총선을 지켜보면서 선진당이 대전·충남에서 석권하다시피 한 것은 필연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당연히 영호남이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짙게 깔려 있어 그 구도를 타파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이번 총선과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 봅니다. 군민회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권리는 누가 알아서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이 적극적으로 찾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취재 여록

박명산 재인당진군민회 회장과의 인터뷰는 3주 전에 끝마친 상태였다. 사업 점검 차 당진에 내려온 그를 만나 인터뷰를 땄지만 박 회장은 취임 전에는 기사가 나가면 안된다며 엠바고를 주문했다. 당연히 그 주에 발행되는 지면을 구상하고 있는 기자로서는 난감한 상활이 아닐 수 없었다.

박 회장은 사진 촬영도 허락하지 않았고 인터뷰를 마치고 식당으로 가자는 약속도 생략한 채 부리나케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꼭 뭐 쫓던 신세가 된 기자는 투덜거리며 돌아서야 했고 그런 일도 기자생활 20여년 동안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박 회장은 명함과 함께 기자에게 CD를 건넸다. 자연사월드라는 CD에는 자연사박물관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박 회장의 활동이 담겨져 있었다. 영화 쥬라기 공원처럼 호박에 들어있던 DNA가 공룡으로 복원되는 것처럼 그의 꿈이 이뤄질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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