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소장(당진역사문화연구소)

기계유씨 유진찬의 차남, 1917년 12월14일 합덕읍 대합덕리 출신
19살이던 1935년 독립운동 결심,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 활동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1986년 70세 일기로 생애 마쳐

당진역사문화연구소에서 한국 현대사의 이해를 위해 서울 탐방 프로그램을 만들어 회원들과 함께 2018년 1월20일 국립서울현충원에 다녀왔다. 국립현충원을 방문할 탐방기획을 세운 취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기본 가치가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중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바로 할 수 있는 곳으로 국립현충원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고, 국립현충원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배우자는 취지에서 현장 방문을 했던 것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독립유공자 묘역이 있다. 독립유공자묘역에는 당진과 관련된 인물도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었다. 당진출신 독립유공자인 유해준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유해준 선생은 1986년 여기에 모셔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유해준 선생의 독립정신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당진 출신의 유해준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다. 또한 유해준 선생에 대해 당진시민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당진역사문화연구소의 임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지면을 통해 소개하게 되었다.

19살, 독립운동을 결심하다
유해준은 당진시 합덕읍 대합덕리 출신이다. 유해준은 기계유씨 유진찬의 차남으로 1917년 12월14일 태어났다. 1917년생이니 만주군 중좌 출신인 박정희와 동갑으로 지난해가 탄생 100년이 되는 해였다. 또한 태어난지 2년 후에 3.1혁명이 일어났으니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이렇듯 유해준은 대합덕리에서 합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예산농업학교를 3년간 수료하였다. 예산농업학교를 다니던 유해준은 19살이던 해인 1935년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일제의 철저한 감시망을 뚫고 혈혈단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19살짜리 미성년자가 그 험하다는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몸으로 머나먼 중국으로 탈출한 것이다.

유해준이 중국에서 처음 찾은 곳은 만주 봉천이었다. 하지만 1935년 당시 봉천은 독립운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1932년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그동안 독립운동의 거점이던 만주지방은 곳곳에서 한인과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공격이 이어져 1935년에는 독립운동세력이 속속 만주를 버리고 중국 본토로 독립운동의 거점을 옮기고 있었다.

유해준도 상하이를 거쳐 난징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난징에는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1925년 전후로 의열단 본부를 설치하고 국공합작의 성과물인 황포군관학교를 매개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시기였다. 따라서 유해준이 난징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은 곧 김원봉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실제로 유해준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 한국민족혁명당의 입당이었다.

유해준은 1936년 항저우로 가면서 조소앙(趙素昻)·홍진(洪震) 등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당시 상해의 독립운동 세력은 좌우가 합작하여 한국민족혁명당에서 하나로 뭉쳐 있었다. 하지만 내부의 사상투쟁과 관련하여 김원봉 중심의 한국민족혁명당에 반발한 조소앙, 홍진, 지청천 등이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해준도 한국독립당에 입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원봉 등은 1937년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바꾸고 산하에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후 유해준은 1937년 광둥중산대학에 입학했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재건을 위해 다시 난징에 와서 한국독립당에 복귀하였다. 중일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이어졌는데 이때 일본군은 중국 남부까지 석권하여 난징대학살을 자행하던 때였다. 이 과정에서 유해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저우 잔류인원의 후송 책임을 수행한 것이다.

이후 유해준은 1937년 중국 황푸군관학교제15기 제1총대 포병대대 제2대에 배속되어 중국학생과 함께 창사·한커우·충칭·비산·청두로 이동한 뒤 훈련을 받고 청두에서 졸업하였다. 당시 광둥중산대학과 황포군관학교에는 독립군 장교 육성을 위해 중국국민당과 합의하여 입교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었다.

『황포군교동학록』에서 확인되는 한인 입교생의 상황을 살펴보면, 매 기수별로 다수의 한인들이 있었는데 유독 15기 졸업생으로는 유해준 뿐이었다. 황포군관학교의 교육내용은 이론교육과 실제 훈련교육이 중시되어 근대적인 사회과학 교육을 통해 정치군관으로서의 식견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

광복군 창설작업에 참여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유해준은 중국군 장교로 임관되어 상위까지 진급하여 활약하였다. 이후 유해준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의 명령에 따라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복귀하였는데, 1940년 2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전속 부관직에 임명되어 광복군 창설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때 중국전방 장사위로부녀회 회장 쑹메이링(宋美齡)을 방문해 한국광복군 창설 축하찬조금 10만원을 받아 광복군총사령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40년 시안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하여,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성과가 1940에 한국광복군으로 맺어진 것이다. 광복군은 1940년 9월17일 중국 임시수도 충칭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구성하면서 정식 창설되었는데 광복군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본명 池大亨),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 총무 처장에 최용덕(崔用德), 참모 처장에 채원개(蔡元凱), 부관 처장에 황학수(黃學秀), 경리 처장 겸 정훈처장에 안훈(安勳, 본명 趙擎韓), 훈련 처장에 송호(宋虎, 본명 宋虎聲), 군무 처장에 유진동(劉振東)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리고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제1 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 지대장에 김학규(金學奎), 제3 지대장에 공진원(公震遠), 제5 지대장에 나월환(羅月煥)이 임명되었다.

유해준은 1940년 후반 시안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의 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 등 10여 명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 나월환(羅月煥)외 50여명과 합류해 활동하였다. 1941년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흡수·개편되자 광복군 전방사령부 소속으로서 파견근무하기도 하였는데, 중국군 중위계급으로 제3구대장직을 맡아 간사단한청반 제1기생을 훈련시켜 졸업시키고 원대복귀하였다.

광복군은 창설 초기부터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 활동에 주력하였다. 당시 일본군 점령 지역인 화북 지방에는 20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초모 활동을 전개하여 병력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한국청년훈련반·한국광복군훈련반을 설치하여 모집해 온 한인 청년들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받게한 후, 광복군으로 편입시켰다. 유해준이 광복군에서 한 주요활동이 바로 초모사업이었다.

유해준은 1942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간부로 배속되어 지대장 고운기(高雲起)·지달수(池達洙) 등 간부들과 함께 신편요원이 되어 쑤이위안성 산바의 중국 제8전구사령부 소재지)로 가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2년에 집유 3년 선고
이렇게 활발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유해준은 1943년 최전방 중국 각 부대를 순방하고, 적후공작 거점이 될 마잔산부대가 있던 신민바오근처의 현 정부 소재지로 이동하였다. 그는 현정부 내에 배속되어 일본의 점령지구인 쑤이위안성 바오터우 잠입하기로 하고 중국 위군에 가입대하였다.

10여 일 뒤 위군복장으로 일군 초병의 검문을 뚫고 통과하였다. 그러나 현지에서 포섭했던 최준(崔俊)이 일본 헌병대에 자수함으로써, 그는 징모분처의 간부들과 일본헌병들에 붙잡혀 일본 구주로 이송되었다. 그 후 처음에 헌병대 본부 구치장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장가구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 구치소에 미결수로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일본 구주 오꾸라 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훈장독립장 수여
한편 광복 이후 유해준은 조소앙, 홍진의 권유로 국방경비대 초창기에 중위로 입대하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안강,기계지구 전투에서 연대장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고향인 합덕을 행군하면서 합덕중학교에서 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합덕중학교에는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독립운동가이던 유해준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유해준은 육군보병학교장과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1967년 8월 육군 소장으로 1군사령부 부사령관 재임을 끝으로 30년에 걸친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역했다.

당시 1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유해준은 전역사에서 “국토통일 성업을 완수할 때가 오면 외견(外見)은 비록 노병(老兵)이되 계급 불요(不要),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성스러운 마음으로 서슴치 않고 사랑하는 나의 1군에 복귀해 여러분들 앞에 서서 싸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는 말을 남겼다.

19살의 나이로 시작한 독립 투쟁을 끝내 완수하지 못하고 분단된 조국에서 전역하는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유해준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86년 4월 15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끝으로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해준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탄생하고 지켜졌는가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유해준과 같은 독립운동가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유해준의 항일 독립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이 독립정신이라는 가치가 새삼스럽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