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용래를 기억하다
시인 박용래를 기억하다
  • 이선우 객원기자
  • 승인 2018.01.22 10:21
  • 호수 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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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의 한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들에
깊은 애정을 보였던 눈물의 시인

잎새를 따 물고 돌아서 잔다 / 이토록 갈피 없이 흔들리는 옷자락 // 몇 발자국 안에서 그날 / 엷은 웃음살마저 번져도 // 그리운 이 지금은 너무 멀리 있다 / 어쩌면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해 // 기운 피곤이 보랏빛 흥분이 되어 / 슬리는 저 능선 // 함부로 폈다 / 목놓아 진다  

-<엉겅퀴, 박용래(1925~1980)>

사춘기 열병을 앓던 시절, 엉겅퀴라는 시를 읊조리고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함부로 폈다 목놓아 진다는 마지막 구절에서는 늘상 한숨을 삼키며 내 안의 슬픔이나 서러움 따위에 빠지곤 했다. 나의 모교인 당진의 한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시인의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나 역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한 뒤였다. 

“너는 집이 어디니?”

“당진이요”

“아, 거기!”

“아세요?”

“박용래라고 들어본 적 있어? 거기 어디 중학교에서 선생님이었다는데”

“아... 네...”     

그 길로 학교 안의 작은 책방에 들러 그의 시집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목차를 주르륵 훑다가 발견한 반가운 제목은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난다.  

바다로 가는 하얀 길 / 소금 실은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가 사람도 싣고 / 이따금 먼지를 피우며 간다 // 여기는 당진(唐津) 송악면(松岳面) 가학리(佳鶴里) / 가차이 牙山灣(아산만)이 빛나 보인다 / 발밑에 싸리꽃은 지천으로 지고

-<가학리(佳鶴里), 박용래>

1943년 당시 명문이었던 강경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은행 서울본점에서 일을 시작한 박용래. 하지만 얼마 못 가 ‘돈 세는 일이 역겨워’ 은행을 그만두고 말았다. 결혼 후에는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생활고에 쫓겨 교사 자리를 얻고 상업과 국어를 가르쳤다.

1961년 당진에 와서 교편을 잡았지만 1965년을 끝으로 전업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딸에게는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독촉하기가 안쓰러워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지만 발밑에 지천으로 지는 싸리꽃처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 떠났으리라.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 /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 고향 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겨울밤, 박용래>

소박하고 조촐한 것,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들에 깊은 애정을 보였던 눈물의 시인, 박용래. ‘풀꽃을 사랑하여 풀잎처럼 가벼운 옷을 입었고’, ‘저문 황토길 오십리에도 달빛에 별발이 어리면 뒷덜미에 내리던 이슬조차 눈물겹도록 고마워하였다’ ‘나물밥 30년에 구차함을 느끼지 않고’ ‘해거름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 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던 시인의 시간을 헤아려보는, 시린 겨울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