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윤 교수

집안의 대청기둥 주춧돌로 사용
집안의 대청기둥 주춧돌로 사용

송악읍 기지시리에서 한진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석포리  갯께 마을 조금 못미처 왼쪽 산록에 송산면 명산리가 나타나고, 그 입구 마을이 <선머리> 마을이다. 원래 <서원머리> 마을이 음운, 축약되어 <선머리> 마을로 변한 것이다. 서원머리-선머리 마을은 즉 동악서원의 입구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아주 유명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동악서원(東岳書院)이 있었다. 지금도 그 터가 있고 주변 민가나 밭에 주춧돌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동악서원은 현재 폐허가 되었지만 서원터와 약간의 유물 및 고기록은 전하고 있다. 송산면 명산리는 원래 옛 면천군 감천면 산북리(山北里), 명성리(明星里), 도문리(道門里) 각 일부와 승선면 서원리(書院里), 금학리(金鶴里) 각각 의 일부를 병합하여 명성(明星)과 산북(山北)에서 한자씩 이름을 따서 명산리(明山里)라 하였다. 따라서 옛부터 내려오던 승선면 서원리 지역이 리(里)에서 강등되어 작은 자연부락 서원머리-선머리 마을로 축소되어 현재까지도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동악서원 아래 다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이곳에 서원포(書院浦)가 있었고, 그 앞의 전답이 모두 바다여서 경치가 으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간척으로 전부 논으로 개답되었다.

동악의 서원인 향현사(鄕賢祠)가 숙종 32년(1706)에 이곳에 건립되었다가 1864년부터 시작된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인하여 고종 5년(1868) 9월에 철폐되었다. 현재 서원터는 지목이 밭으로 변경되었지만 그 전체적인 모습은 어렴픗이 남아있다. 양쪽과 전면 끝은 폭 1미터 정도의 제방 비슷하게 둘러싸여있고, 전면은 밑에 있는 경지와 턱이 지게 평평한 지대로 되어 현재는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명산리에 사는 박효준 씨 소유의 밭으로 서원터는 명산리 35-4번지이다. 넓이는 약 694제곱미터이며 꽁배재 야산에 있다. 예전에는 밭을 갈 때 지게로 몇 지게 정도씩 제사지낼 때 쓰던 술잔, 술병 등이 나왔다 한다. 밭 가운데 옛 무덤 같은 것이 하나있는데 촌노들은 이것이 서원이 철폐할 때 쓰던 각종 제사도구를 묻은 곳이라 한다. 현재 동악서원의 추춧돌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계순 댁에는 대문 계단에 주춧돌 1개를 주워다가 사용하고, 박효준 댁에는 큰 돌기둥 2개를 같다가 대문 앞 계단 문틀로 붙여서 사용하고 있다. 오한영 댁(전 김원규 씨 집터)는 재간에 계단석으로 1개, 뚝이 무너지지 않게 밭둑에 네모난 사각이 다듬어진 돌 1개, 대청의 정면 기둥 밑에 주춧돌 1개가 있다.

전에 서원 철폐 할 때 묻었던 제기가 몇 지게 나오고, 항아리 속에서 밤나무 35cm정도의 위패가 나왔는데, 신농씨, 복회씨라고 써 있었다 한다. 아직 촛대, 벼루, 주전자가 아직 미출토 되었기에 밭가운데에 있는 옛 무덤 같은 것이 그것을 묻은 것 같다고 한다.

옛 서원포를 사이에 두고 북쪽 약 5리 지점 즉 들판 건너다 보이는 송악읍 정곡리 바드물(外井村)에 동악 자손들이 모여 사는 부락이 있다. 즉 동악의 소실 유씨 부인 묘소가 이곳에 있으며 13대째 그 후손들이 자연부락을 이루며 살고 후손들이 심었다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다. 이 마을 뒤 야산을 오르면 500-500평의 묘역에 3-4기의 묘소가 있다. 맨 위쪽에 동악의 부인 청송 유씨(靑松 劉氏)의 묘소가 있다. 군내 최고봉인 아미산 줄기를 향해서 계좌향(癸坐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악 이안눌은  인조10년(1632) 명나라에 주청사(奏請使)로 다녀와서 원종(元宗)의 추존을 받아온 공로로 정미면 사관리에 사패지를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사관리 비석마을에 동악 이안눌의 묘소와 신도비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조선 초기 시문학을 주름 잡으면서 양으로는 으뜸이요, 질로는 불군(不群)인 동악 이안눌의 묘소와 서원터가 당진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안눌은 (1571-1636) 선조2년에서 인조 15년까지 살았던 조선시대의 유명한 시인이다. 이안눌의 자는 자민이요 호는 동악이며 본관은 덕수 이씨로 1571년 6월 선조2년 서울 성서(도봉구 방학동)에서 아버지 이형(李泂)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636년 3월 29일 인조 15년 66세로 돌아갔다.

그는 서울 남산 동쪽 기슭인 낙선방 청학동 동원(東園)에 살았기에 지금도 동국대 안에 동악시단(東岳詩壇)이 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이안눌은 선조34년(1539)에 문과에 차상으로 올라 예문학, 대제학, 단천군수, 홍주목사, 함경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전라도 담양군수, 경상도 동래부사, 경기도 강화부사 등 역대 고관 중 아주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인조2년(1624) 이괄의 난 때 반란을 방관했다는 지탄을 받아 경원에 정배 2년, 다시 홍천에 이배되어 3년 도합 5년 만에 풀려났다. 문혜공의 시호를 받고 전남 담양 구산서원에 제향되고 저서에 시집 동악집 30권이 전한다.

밭둑에 있는 서원의 돌기둥
밭둑에 있는 서원의 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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