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미(수필가)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의 자리에 있어 볼일이다. 보통사람들은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해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었다.

노량진에서 두 해를 보낸 큰딸이 집으로 들어온 지 4개월 조금 지났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겠단다. 만지면 가랑잎 소리 날 것 같은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이 한겨울 이겨내고 꽃잎 품은 개나리 같다. 그만하면 몸과 마음에 안정이 찾아들었지 싶다.

아이의 얼굴에 편안함이 보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대감이 생겼다. 자신이 떨어뜨린  기다란 머리카락 정도는 줍겠지. 어쩌다 한 번 쯤은 퇴근하는 엄마를 위해 저녁 밥상을 차려 놓으려나. 주말에는 세탁기로 빨래 좀 돌려서 널어놓겠지. 어쩌면 엄마가 좋아하는 화분에 물을 주는 애교도 부릴 거야.

아이는 주말도 없이 언제나 진시(辰時)에 도서관에 갔다가 해시(亥時)가 되어야 귀가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맨 먼저 하는 일은 양말이나 옷도 벗지 않은 채 쇼파와 한 몸 되기 또는 멍 때리기를 한다. 한 집에 살지만 밤 열시에 잠자리에 드는 나는 아이가 씻고 잠드는 것을 대체로 보지 못한다. 따라서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다.  

내가 나가는 직장은 일 년 중 삼월이 가장 바쁘다. 그 한 달만 잘 보내면 순풍에 떠가는 돛단배처럼 일 년이 흘러간다. 삼월에는 저녁 준비고 뭐고 다 내려놓고 나도 큰딸처럼 쇼파와 한 몸이 되기 또는 멍 때리기를 하고 싶다. 하지만 어디 엄마와 아내라는 자리가 그럴 수 있는가. 직장 정문을 나설 때는 한 발짝도 떼기 싫을 만큼 지쳐있다가도 자동차 시동을 켜는 순간, 냉장고, 식탁, 마트가 동시에 떠오르면서 이미 주부로 변신한다. 가정이라는 직장으로 다시 출근하는 기분이다.

토요일이다. 지인에게 경사가 생겨 축하하는 중에 큰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매달 말일은 도서관 사물함을 비워줘야 하는데 급한 볼일이 있어 그냥 다른 도시로 출발해 버렸단다. 대신 좀 비워달라는 부탁문자였다.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평소 품었던 불만이 끌어 올랐다. 짜증이 나서 내 볼일 다 본 후 도서관 문 닫기 직전에 갔다. 딸이 보내 준 설명서를 읽었다. 먼저 4층으로 가서 ○○번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란다. 열리면 책을 꺼내 1층으로 내려가 건물 밖 유료 사물함에 넣고 다시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지령이 있었다.
 
딸이 시키는 대로 4층 사물함을 열었더니 얼마나 많은 책이 들어있는지 깜짝 놀랐다. 그 작은 체구로 매달 이 많은 것들을 옮기려고 개미처럼 여러 차례 오르내렸을 것이 아닌가. 또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는지 책갈피마다 손때가 묻고 메모가 빼곡했다. 이 책을 펼쳐놓고 졸기도 했겠지. 멍 때리는 순간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것을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 자신을 채찍질 했을까. 인터넷 강의를 듣고 메모했는지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다. 내 딸의 체취를 느끼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동안 품었던 불만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 좋아한다, 이해한다는 말로 감정을 표현한다. 모두 다 ~한다는 표현은 쓰지만 정작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가슴에 품는 순간부터 고민과 고통이 따른다. 오죽하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유행가 가사에 가장 오랜 시간동안 잦은 단골로 등장할까.

이해는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설령 이해한다고 해도 물로 씻어내듯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해는 그냥 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허물을 벗듯 몸만 빠져 나간 딸내미의 이부자리와 화장대를 정리하는 손길이 전보다 훨씬 가벼운 것은 그냥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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