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윤 박사

▲ <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 상에 그려진 대난지도와 소난지 섬

당진시의 최북단 석문면 난지도리에 속하는 섬으로 대난지도와 소난지도가 있다. 대난지도 (大蘭芝島)는 석문면 교로리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해상에 있는 당진시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소난지도, 우모도, 소조도 등의 섬이 연이어 있다. 대난지도에는 천연해수욕장인 난지도해수욕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당진3경으로 불린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바다를 막아 염전을 만들고 농경지도 조성하였다. 현재 대난지도와 소난지도를 다리로 연결하는 연육교 건설이 진행되고 있어 2~3년 내로 완성되면 두 섬은 붙어 전천후 관광지로 변할 것이다.

본래 당진군의 도동면 대난지도리라 하여 석문면에 편입되었다. 예전에는 대난지도, 소난지도 구분 없이 보통 난지도(難知島)로 불렸다. 지명한자도 어려울 난자(難)로, 원래 난초난자(蘭) 가 아니다.

난지염전이 있던 곳이 어항처럼 쏙 들어온 천연의 양항 구실을 하여,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서 현물세를 서울 경창으로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태풍을 피하여 소난지도에 기항했다가, 소난지도가 만원이면 일부가 대난지도에 기항하였다. 소난지도 앞에는 우무도가 있어서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 주었다.   경기도 옹진군 대부면 풍도와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 사이의 한여울 물살이 세어서 조운선이 다니기 어렵기에 원래 이름은 어려울 난(難)자를 써서 난지도(難知島)라고 지었다.

고대면 슬항리 거주 고 차석기씨가 1989년에 저술한 『풍도리지(風島里誌)』에 보면, 난지도와 관계있는 귀중한 민요 한편이 실려 있다.

‘네가 잘라서 일색이냐, 낸들 으려서 일색이냐.
풍도라 생길려면 석시나 있구, 난지라 생길려면 석시나 없지.
삼사월에 오는 배가, 난지로 쫒겨가네’
(석시; 폭풍을 대피할 수 있는 포구)

전라도 곡창지대로 조세곡을 실러 나갔던 남편이 몇 달만에 와도  폭풍우를 대피하는 포구가 풍도에는 없고 난지도에만 있어서, 기항하지 못해 얼굴도 못보고 다시 난지도로 들어가는 광경을 본 풍도 아낙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민요로 해서 부르던 노래이다.

1530년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당진 편에 “난지도수(難知島戍)가 현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주위는 34리이며, 당진포의 만호(萬戶)가 군병을 나누어 지킨다.” 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 내용으로 보아 난지도는 고대면 당진포에 주둔하던 수군만호의 병사가 현재의 대난지도 말막금 지역에 파견을 나가 지키던 군사 요충지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당진 편에 “대난지도리는 관아에서 60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호 44호 가운데 남자는 56명이고, 여자는 104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 충청도 조운선의 천연 피박지
소난지에는 상범선이 9척-인천간 왕래

『해동지도(海東地圖)』 당진 편의 내맹면 서쪽 해안에 난지도(蘭芝島)가 보인다. 『1872년 지방지도』 당진편의 남단에 대란지와 소란지로 구분하여 표현되어 있다. 『조선지형도』 풍도편에는 석문면 북쪽 바다에 대난지도가 확인된다.

소란지도(大蘭芝島)는 당진시의 최북단 석문면 난지도리에 속하는 섬이다. 대난지도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섬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가 편찬될 당시에는 당진현 내맹곶면 소난지도리로 남자 60명, 여자 91명, 총인구가 151명이고 민호가 39호인 인구가 꽤 많은 섬이었다. 『여지도서』 당진편의 남단에 ‘대난지’와 함께 ‘소난지’가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형도』 풍도 편에는 석문면 북쪽 바다에 소난지도가 확인된다.

옛날 전라도 충청도 등지에서 세금으로 낸 조곡미를 실어서 운반하던 조운선이 서울 경창(京倉)으로 갈 때 풍랑을 피해서 쉬어가거나 한강이 결빙하면 조운선이 상륙할 수 없어 얼음이 녹고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던 좋은 피항 포구이었다. 구한말 국권회복을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홍일초 휘하 150여 의병들의 무덤인 의병총(義兵塚)이 있고 절벽에 난초가 자라고 있다.

조선총독부 발행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1910년)』에 보면, 섬 주변은 이토나 사빈으로 되어 있고 암초가 적고,  남측의 전면에는 우안도 외에 하나의 작은 섬이 떠 있어 파도를 막아서 자연의 박지(泊地)로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이다. 만조시에는 수심이 12~13 심(尋), 간조시에도 2-3심(尋)이 되어서 충청도에서도 유수의 호박지(湖泊地)이다. 심(尋)이란 중국 주대(주대; B.C. 1122~256)이전부터 사용되던 단위로 1심은 8자(尺)에 해당된다. 주 시대의 1자는 약 20cm, 일제시대의 1자는 약 30cm이다. 일제시대이므로 1심은 약 30cm로 환산하면 된다.

조선시대 남쪽에서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전라도, 충청도 조운선의 유명한 피박지(避泊地)였다.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도 대난지도에는 1개소, 소난지도에는 4개소가 있어서 소난지도가 주민들이 식수취득이 쉬워서 거주하기에 더 유리했다. 소난지도에는 민호가 50호에 약 170~180명 정도가 거주했다. 대, 소난지도 공히 경지가 좁아서 식량이 부족하여, 출가업(出稼業)이나 어업 (漁業)을 행했는데, 특히 소난지도에는 상범선 (商帆船) 9척이 있어서 회조(回漕)를 업으로 해서 매년 각지를 왕래하였다. 당진, 서산, 해미 3개 군과 인천 간을 왕래하면서 신탄, 곡물, 화물을 실어 날랐다.

대난지도도 자연 농지가 부족하여 자연농업보다는 선박을 소유하여 조운업에 종사하는 자가  많았다. 소난지도에는 회조업(回漕業)이 성하여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고, 여력이 많아, 서방(書房; 私塾)을 두고 구식으로 어린이들에게 한문 초보를 가리켰다. 어업은 수조망(手操網), 일본조(一本釣) 등이 행해지고, 멀리 외해까지 출어했다. 어선은 대, 소난지도 각각 2 척씩 총 4척이 있었고, 석수어(石首魚;조기), 대도어(大刀魚;갈치), 백어(白魚;뱅어), 하(鰕;새우),  노(&#40056;;농어), 치(&#37657;;숭어), 잡어(雜魚) 등을 잡았다.

당진시 통계연보> 에서 2007~2015년 사이의 난지도 인구를 살펴보면, 8년 사이에 인구수에 변화가 없고, 대난지도는 면적이 5.082㎢, 100 가구, 182명이, 소난지도는 면적이 2.654㎢, 58 가구, 96명이 거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