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전쟁기념사업회 이성이 사무국장

석문앞바다 웅포(곰개)는 국제 해전장이었다. 그 외에도 지금부터 1300년 전에 당진시에 있었던 역사에 누락된 사실을 안내한다.

1.백촌강 전투
당진시 석문면 장고항리 해변으로부터 당진시 송산면 성구미 앞에 이어 삽교호로 들어가는 바닷길은 중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백강 또는 백촌강으로 표시되었다.
서기 663년 8월27~28일(음) 당(唐)의 해군함정 170척이 현재 삽교호 남쪽에서 삽교천과 무한천이 갈라지는 쪽 즉 아산시 선장면의 선장항 선착장(현재 육지로 변함)에 정박하여 무한천 상류 20km지점에 있는 백제 부흥군의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의 임존성을 공략하려던 당(唐)의 함정(170척)은 머나먼 왜국으로부터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서 백촌강, 백강구의 현재 석문방조제 서편에 있는 웅포(곰개포구)의 산(山) 아래 숨어 있던 당(唐)의 함정의 높은 현측에서 불화살과 불장작을 ‘왜군’배에 던져 400척을 불태웠고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육지에서 지켜보던 부흥군의 풍왕은 홍성의 주류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수물에 떠밀려온 왜군병사들은 당진시 고대면 대촌리의 작은 동산에 1,000여명의 왜군시체를 당(唐)의 해군제독 유인궤는 문관출신답게 9월2일(음) 「막무덤」에 조제를 지내주고 원혼을 달래 주었다.

-막무덤
위의 해전에서 일방적으로 패한 왜국병사는 서기 663년 8월 27~28일(음)의 전투에서 바다에 빠졌고 조수물에 떠밀려 마치 누에처럼 허옇게 된 시체는 현 석문면 보덕포 앞에서부터 고대면 대촌리 약 9km의 막무덤이 동산에 떠밀려온 왜국의 수천 시체를 당(唐)의 장수 유인궤는 문관출신답게 이곳 막무덤에 묻어주고(9월2일) 원혼을 달래주었다.

-면천의 피성(몽산)
662년 12월(음) 풍왕과 복신은 왕성을 홍성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옮겼다가 익년 2월 다시 귀환했다.

-신평의 바닷가 흙성(신라수군과의 싸움터)

-손량(孫梁)과 지벌포(只伐浦)
손량은 고대면 장항리 장항천 하류 500m지점 옛 선착장이고, 지벌포는 역시 장항만내 보덕포 옛 선착장 자리인 ‘지섬’이란 곳이다.(당진포리 강진성옹 증언)

-무테(테레성:牟弓)(송악읍 정곡리 배울마을)
백제부흥군을 도우러 왔다가 마지막 성(城)인 임존성(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이 함락되고 석문 앞바다의 해전에서 패한 ‘왜군’과 그 가족들은 당진 송악 정곡리 배울마을(안섬 서쪽에서 정남쪽으로 4km 지점)에 있던 왜의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떠난 곳이다.

백제부흥군의 본거지였던 주류성(홍성군 장곡면 대현리 학성, 산성리)이 함락되고 난 후 왜국장병들과 가족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구나. 무어라 할 말이 없도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조상님들의 묘소를 어이 또 와 볼 수 있겠는가? 오직 테레성으로 가서 일본의 군장들과 만나 중요한 일들을 상의하여 볼수 있을뿐이로다.”

-663년 9월 7일(음) 백제지도층은 일본광명을 결의하고 가족들이 있는 침복기성(심부까사시:홍성군 장곡면 광성리)으로 내려와 처자를 데리고 테레성(송악읍 정곡리 배울마을 석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9월 13일(음) 무테의 테레성에 도착하였다.

-9월 24일(음) 일본의 군선과 좌평(佐平) 여자진(余自進) 달솔 수소귀자(水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首) 억례복유(檍禮福裕)와 국민들이 테레성으로 왔다.

-9월 25일(음) 일본군선을 타고 백제유민과 일본군 5,500명이 일본을 향하여 출항하였다.

맺는말
백제부흥운동은 1913년 쓰다 교수의 학설이 나온 후 100년간 무려 16개 학설이 난립되었다.
우리 백제부흥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박성흥(예산 덕산) 학설을 중심으로 일본서기와 중국사기를 통하여 당진의 무려 9곳 이상을 발굴하여 ‘백제부흥전쟁사’를 펴냈고 곳곳에 안내판을 세우려고 준비 중이다.
왜국(일본)이 백제를 도우려고 많은 희생을 했으며 唐(중국)은 신라와 합세하여(나당연합군) 특히 당진의 곳곳에서 전쟁의 자취로 얼룩졌다.
역사(歷史)의 정정을 이로 인하여 확정될 것을 기대하며 한반도의 역사에서 일본과 중국을 빼놓을 수 없는 지금에 와서는 삼총사와 다름없는 동북아의 삼국은 세계에서도 앞장서는 국력을 향상시켰다.
이제 삼국은 ‘세계평화’를 위하여 힘을 합할 때가 되었다. 이제 당진의 17만 시민은 일본 중국의 관계시민 ‘자매결연’을 통하여 역사의 족적을 찾아서 단결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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