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김복선 바위
김복선은 기인으로 아직 그에 관한 출생이나 사망에 이르기까지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신평면 금천리 망객산을 중심으로 많은 전설이 전해온다.



김복선은 기인으로 아직 그에 관한 출생이나 사망에 이르기까지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신평면 금천리 망객산을 중심으로 그의 전설이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에 관한 전설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김복선은 홍주목 신평현(洪州牧 新平縣) 사람으로 병서를 좋아하였다.


가문이 미천(微賤)하므로 동리의 약정(約正 : 조선조 때 향약 단체의 임원)이 되었더니 후에 염평공직(廉平公直)을 하였다.
임진왜란(서기 1592~1598)에 마을 사람이 모두 피병입산(避兵入山)하나 복선은 홀로 집을 수축하고 있었더니 난이 평정되어, 후에 사람들이 돌아와 그의 선견을 탄복하였다 한다.


인조 병자년(서기 1636)에 복선이 인조께서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심을 듣고 청나라 대장 용골대(龍骨大)의 군중으로 뛰어 들어가 후매광규(後罵狂叫)하여 방약무인하니 청병(淸兵)이 잡아매려하나 용골대가 눈짓으로 못하게 하고
“이 사람은 조선의 지사(志士) 김복선이다. 이런 사람을 등용하였으면 내가 어찌 이곳에 왔겠느냐?”
고 말을 하며 그의 행동을 그대로 두었더니 복선이 꾸짖다가 방성대곡하고 어디로 가버렸다 한다.


둘째 전설은 조선 선조 때 천인 김복선이 당진군 신평면 망객산(望客山 : 69.7m)에 숨어 사는데 세상 사람이 업신여기나 오직 율곡 이이(李珥)와 토정(土亭) 이지함이 그 높은 학식과 숨은 재주가 있는 것을 알고 가끔 찾아와서 세상일을 상의하다가 앞으로 있을 임진왜란의 일을 크게 걱정하니 김복선이 토정과 율곡을 번갈아 보면서


“인신년 상사(寅申年喪事)에 왜 임진년 걱정을 하십니까?”
하며 서로 한탄하다가 작별 하였는데 김복선이 이 산에 올라와서 두 분이 돌아가는 것을 멀리 바라보았으므로 「망객산(望客山)」, 「객망산(客望山)」, 「손바라기산」이라 하였으며 토정은 무인년(戊寅年)에 율곡은 갑신년(甲神年)에 각기 돌아가서 임진왜란을 보지 못하였다 한다.


셋째의 전설은 아산만은 원래 좁고 긴 만인데 선조 때 토정 이지함이 아산 현감이 되어 민정을 살피느라고 이곳을 순시하다가 지함(地陷)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주민에게 피난할 것을 권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곧이듣는 사람은 없고 또 시각이 임박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한탄하면서 망해산(望海山)으로 올라가 땅이 함몰되는 광경을 살피려 하는데 한 등짐장수가 이 토정을 따라오더니 토정이 앉은 아래쪽에 옹기짐을 받쳐 놓고 앉으므로 토정이


“위험하니 이리로 올라오라.”
하니까 그 사람이 웃으면서
“참 겁쟁이라고! 아무 염려 마시오.”


하고 그대로 앉아있는데 과연 천지가 진동하더니 등짐장수가 받쳐놓은 작대기 끝까지 땅이 함몰되어 바다가 되었다 하는데 이 등짐장수가 곧 망객산의 김복선이였다고 한다.


넷째 전설은 율곡 이이와 토정 이지함이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걱정하면서 이 난을 평정하는데 신평 망객산의 김복선은 3년 평정이요, 전남 광주의 김득녕이 5년 평정이요, 아산 배암밭의 이순신은 7년 평정인데 김복선, 김득녕은 천인이므로 이순신이 평정하도록 되었으므로 임진왜란이 7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다섯째 전설은 신평 망객산의 김복선은 축지법을 써서 세상을 날아 다녔다.


이 망객산은 토기(土氣)가 있어 땅을 억누르는 지기(地氣)가 뛰어난 산이므로 김복선이 축지법으로 온 세계를 누빌 때는 손을 들면서 떠나고 돌아오곤 하는 산이라 『손바래기산』이라고도 부른다.
하루는 보령시 성주산에 있는 한 도승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축지법을 잘하는 명사가 있다 하여도 중국의 소주(蘇州)를 사흘에 서너 번 왕래하지는 못 할 것이나 다만 나는 할 수 있다. 「손바래기산」의 김복선이 축지법에 능하다고 하나 소주를 서너 번 왕래 하는데 꼬박 열흘은 걸릴 것이다”라며 내기를 해보자고 전하자, 김복선이 말하기를


“축지법이 무슨 자랑이라고 내기를 하느냐? 아직 수양이 덜되었구먼…제 죽을줄 모르고” 하고 얼굴을 돌리더니 “내가 그렇잖아도 며칠 있다가 중국땅을 세 번 급히 다녀올 일이 있는데 그때 내가 돌아오는 길에 성주산에 들려 시각을 알려드리리다.”
하였다.


김복선의 이 말은 바로 보령시 성주산의 도승에게 알려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 성주산 기슭에 한 밤중에 큰소리로
“한번이요.”
“두 번이요.”
“세 번이요.”


하는 소리가 꼭 하루를 지나는 시간에 연속해서 사흘 동안 계속 되었다. 사흘째 김복선이 중국 소주땅에서 돌아올 때는 중국을 세 번 다녀왔다는 표시로 고운 풀잎을 세 잎 떨어뜨렸다.

도승은 성주산의 암자에서 그 풀잎을 바로 손바닥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들어서 냄새를 맡은 다음
“세 번 하기는 했는데 시간이 나보다 한 시간 빠르구나!”
그날로 산을 누비며 몇 번 연습을 하다가 훌쩍 그 어려운 중국행을 하게 되었다.


도승은 김복선보다 한 시간이 늦으므로 두 시간을 단축해서 김복선보다 우위에 있고 싶은 욕심에서 최선을 다해서 축지법을 썼으나 끝내는 김복선이 말대로 세 번째 돌아오는 길에 자기의 힘이 약해져서 황해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성주산의 도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그 날로 눈치 챈 김복선은 손바래기산 땅에 기대어 몇 번 냄새를 맡더니 조용히 잠자리에 누웠다 한다.

▲ 김복선의 24다랭이 논
① 김복선의 임진왜란 평정

이율곡 선생은 도통하신 분인데 이 분이 정승으로 계실 때 가만히 앞일을 내다보니까 십년 후에는 왜적이 우리나라에 몰려와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 같아서 이런 국난을 어떻게 누구하고 의논해서 처리해야 할까 하고, 의논할 만한 사람을 찾아 팔도를 돌아다닐 작정으로 서울을 떠났는데 우선 충청도 합덕에 왔다.

합덕에 와서 거기 있는 큰 방죽가에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김복선이가 쫓아와서
“대감님 내려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드렸다.


김복선이는 양반댁 종이지만 지혜가 많아서 앞일도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율곡 선생은 김복선이를 보고 이 자는 앞일을 내다보는 인물이란 것을 한 눈에 알아보시고
“십년 후면 왜적이 쳐들어올 줄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좋겠느냐?”
“예. 팔 년 평정이 되겠지요.”
“팔 년이나 걸리다니…… 내가 나서면 어떻겠느냐?”


“대감하고 송구봉 선생하고는 그 안에 돌아가십니다. 두 분께서 돌아가시지 않으면 왜적이 쳐들어오지 못합니다.”
“다른 무슨 방책이 없겠느냐?”


“저 아래 전라도 어느 골 아무개란 백정을 시키면 사흘이면 평정시키구, 소인이 합당하면 석 달이면 평정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양반들이 하게 되면 팔 년이 걸립니다.”
율곡 선생은 조정에 들어가서 십 년 후면 왜적이 쳐들어오니 양병해야 하고 왜병이 쳐들어오면 전라도 아무 곳 백정이나 충청도 김복선을 보고 그 난을 담당케 하라고 했다.


그런데 임진년 왜병이 쳐들어와서 나라꼴이 위태롭게 되었는데도, 아무개 백정이나 김복선 같은 천인에게 맡겨서 평정해서야 쓰겠냐고 이순신을 선봉장으로 삼아 왜적과 싸우게 했다. 그래서 이 왜란을 평정하는데 팔 년이 걸렸다.

② 김복선 왜적 퇴치

임진왜란 때 망객산에 살던 김복선이 순성면 북창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맞아 마누라의 앞치마를 기로 만들어 솔숲에 꽂음으로써 왜선들이 이를 보고 군사가 많은 줄 알고 배를 돌려 달아났다고 한다.
1970년대 사방공사를 하기 전까지 망객산에는 김복선이 살았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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