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 준 (朴哲濬) / (예) 공군대령

약 력
- 경남대 정치외교학 박사과정
- 합동참모본부 작전참모부 연합/합동작전담당
- 한미연합사 미사일방어처장
- 한미동맹기념관 추진위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분통이 터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다.
역사의 눈길은 패자에게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없다.


아무리 승자라 하더라도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무대의 한 중앙에 서 있는 그 순간뿐이다. 그러나 고려를 개국한 영웅으로 한순간 역사의 조명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반역자의 칼에 쓰러진 박술희는 후세로부터 잊혀지게 되었다. 특히 반역자의 쿠데타가 일부라도 성공한 경우에는 반대파 일가족은 대부분 몰살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진의 면천박씨 시조인 박술희의 후손은 남한에는 5천명 내외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신라와 당나라의 공무역을 담당하였던 대진(大津)은 당진(唐津)이었다. 당진을 중심으로 가장 큰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였던 박술희(朴述熙) 장군에 대해 1.2.3.4부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1부에서는 박술희와 복지겸 그리고 당진에 대해서 알아보고, 2부에서는 고려를 개국한 태조왕건의 의형제인 박술희에 대해서 기술하고, 3부에서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도 후손들로부터 가장 홀대받고 있는 박술희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또한 제4부에서는 박술희 장군 기념관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복지겸의 아름다운 낙향

태조 원년(918년) 8월에 개국 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혜성부원군( 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면천지역의 토지 300경(약 180만평)을 하사 받았으며 자손대대로 세습되었다.
개국의 위업을 이룩한 장군은 고려왕조가 안정되자 고향인 면천(혜성·??城)으로 낙향하여 지역 고을들을 다스리며 마지막까지 백성과 더불어 일생을 봉사한 위대한 분이시다.


한편 효성지극한 장군의 딸 영랑은 전장(戰場)을 누비며 국사(國事)에 전념하는 동안 쇠약해진 아버지를 위해 정성으로 백일기도를 올렸다 한다.
이때 아미산(蛾眉山) 신령의 계시를 받아 마을에 은행나무를 심고 안샘의 물을 떠서 진달래 꽃으로 두견주(杜鵑酒)을 빚어 정성으로 봉양하니 장군이 완쾌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구전(口傳)되고 있다.


현재에도 유적으로 설단비와 사당인 태사사가 이곳에 있으며, 시조의 딸 영랑(影浪)이 심었다는 1,100년된 은행나무가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있으며, 또 시조와 관련된 군자정이 있고 이 밖에 딸 영랑의 효심과 관련된 안샘과 민속주인 두견주가 있다.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 복지겸 장군 묘역에 대해 2차에 걸쳐 사당과 재실 내·외삼문, 안채, 문간채, 부속사, 조경 연못 및 주차장 조성을 조성하여 내방객을 위한 휴게공간을 마련하였다.


1000년 동안 잊혀진 박술희

당시 중국의 경우 역적에게는 9족을 멸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술희가 역적의 모함을 받아 강화에서 죽임을 당하였을 때, 박술희의 가문은 거의 몰살을 당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깊은 산중으로 도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면천(혜성)은 곡창지대이며 중국(唐, 漢)과 교역을 하던 대표적인 해상무역의 요충지였다.
개성(왕건)이나 나주(견훤) 등과 같은 동질적인 성격을 가진 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진 지방호족인 박술희 장군의 정치적 역량을 만들어 준 충남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당진은 조선시대에도 상업, 교역은 물론 경제, 문화 등에 많은 영향을 준 내포문화의 발상지로서, 새롭게 변모하는 당진의 발전과 더불어 반드시 새로운 역사·문화의 축으로 재조명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박술희 장군이 면천출신인 것은 확실하다. 다만 강화도 갑곶에서 생을 마감함으로서 가족들이 본을 숨기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무덤에 대한 근거와 흔적을 찾기 어렵고, 면천 박씨 종친회에서도 의정부에 기념단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면천박씨는 북한 해주지역에 집성촌(集姓村)이 있으며, 해주의 방현서원(傍賢書院) 등은 면천박씨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박술희 장군은 유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실정으로 후대들로부터 가장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위안을 갖는 것은 면천박씨 종친회에서 아무런 연고는 없으나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에 면천대를 설치하고 박술희 장군의 단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으나, 의정부 도심의 개발에 밀려 다른 장소로 이전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상태이다.


박술희·복지겸의 주둔지역 추정

생가지역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시 박술희 장군은 면천지역을 지배하는 호족이었으며, 개성의 왕건, 나주의 견훤 등과 비교될 정도의 사병을 양성하여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호족들은 비교적 큰 산과 들, 해안 등을 갖춘 지역을 주로 선호하였다. 면천의 지리적 여건 고려시, 근거지는 아미산 일대가 될 것이다.
전술 및 전략적으로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높은 고지군에서 넓은 지역으로 감시하고 관측하기 위해서는 아미산 정상은 반드시 확보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아미산과 적을 맞아 싸우기 용이한 지형을 찾아 진(陣)을 구축하였을 것이며, 방어가 취약한 부분은 성을 쌓아 이를 보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및 고려초기에는 대부분 성곽의 형태가 토성 또는 자연석을 쌓아올린 형태이다. 면천 아미산 지역은 몽산토성을 중심으로 토성(土城)내에 주요 군진(軍陣)을 꾸렸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후에 고려 및 조선시대에 인접지역에 석성(읍성)인 면천읍성을 쌓고 발전시켜왔을 것임을 알수 있다.
실제로 면천지방의 호족 입장에서 상대할 적은 바다의 오랑캐와 인접 호족이었을 것이다.


이들로부터 지역민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는 지역이 필요하였다.
당시 풍수가 성행했던 점을 고려시 풍수적으로 아미산을 주산인 현무로 하여 좌?우측에 청룡과 백호를 거느리고 멀리 가야산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와 같은 형상임을 고려시 명당지역으로 꼽히고 있음을 알수 있다.
실제로 당시의 상황을 고려시 외부침입과 자연현상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동계에는 매서운 북풍을 막아 줄수 있으며, 난방을 위해 땔감 확보가 필수적이었음을 고려시 인간이 살기에도 편안한 지역으로 분류되는 본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의 면천읍성이 1439년(조선 세종 21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평지읍성으로 축조한 것을 기초로 판단하더라도 읍성 축조전 4~500여년 전에는 읍성과 같은 평지의 석성보다는 자연 지형지물을 이용한 토성의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역사인물의 발굴과 선양은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주민의 자긍심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지역의 인재육성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오는 등의 역사, 문화, 교육의 복합적인 콘텐츠로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왕건, 신숭겸, 박술희 의형제 중 둘째인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동상은 탄생지인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있는 용산단 경내를 비롯한 순절지 등 3곳에 있다.
대구 동구 봉무동 파군재 삼거리, 묘소가 있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경내에 모셔져 있다.


신숭겸이 순절한 대구의 유적은 1981년 대구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표충사, 표충단, 충렬비를 세워서 신숭겸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신숭겸이 모셔진 강원도 춘천 서면은 한국의 유명한 박사마을로서 춘천 서면에는 15가구당 박사1명 골로 한승수 총리 등 114명의 박사를 배출하고 있다.


당진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고 후세를 위한 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당진의 문화관광 사업의 거점이 될 수 있도록 복지겸 장군의 사당, 면천읍성, 아미산 등과 연계하여 관광객들의 편의와 볼거리, 학습의 장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홍성으로 이전하는 도청과 홍성군, 예산군, 서산시, 태안 등과 어우러져 우리 지역에 꽃피었던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실체가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재조명 받을 수 있도록 추진하여야 한다, 또한 당진군내에서도 단위면(面) 별로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내포문화의 특징, 성격 등을 충실히 반영해 문화와 역사도시를 갖춘 21세기형 당진 건설을 추진하므로서 당진의 자긍심을 한층 높일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유적의 역사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관광자원화를 통한 문화재의 가치증대를 함께 시도하여 문화와 지역경제발전이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추진하여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역에 인물이 있어야 인재가 나온다 하였다.
이제 충남을 대표하는 당진의 소중한 역사인물의 발굴과 유지의 전승은 후손된 자의 도리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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