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교대 명예교수·한국진달래문학관 관장 최명환

닷새 동안 다섯 번은 눈시울을 적셨고, 한동안 무거운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정용선의 《낯선 섬김》을 읽은 소감이다. ‘네 뜻대로 하거라, 네 차례의 한국장애인인권상 수상, 충남경찰이 노인안전 치안으로 대통령 표창, 범죄 피해자의 아픔까지 보듬는 경찰’을 읽고 무거운 마음을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자질을 갖추어야 마땅하다. 자질의 요소를 인문학에서 ‘문사철’이라고 하지만, 나는 ‘과문사철’로 고쳐 말한다. 이를 ‘철학, 이론, 전략, 실천’으로 가름할 수 있겠다. 철학이 고금 동서의 고전을 담아야 한다면 이론은 소속 분야의 전문성을 함축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계한 전략을 현장에서 실천해야 혁신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경찰’하면 ‘철학, 이론’과는 멀고 ‘전략, 실천’과는 가까워 보인다. 경찰이 머리와 가슴보다 손과 발로 뛰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경찰이 앞으로 거듭나려면 머리로 철학하고 언어로 이론해야 한다.

저자는 누구도 엄두를 못 내던 경찰 혁신의 전략적 방안과 실천으로 크나큰 업적을 남겼으니 축복임에 틀림없다. 충남·대전·경기의 경찰상이 바뀌었다. 그래서 정용선 청장이 근무하던 곳의 경찰이 달라지자 사람들의 마음이 감동되어 환경이 바뀌었으며, 범죄피해자도 웃음짓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낯선 섬김》을 읽고 나서야 이 제목의 속뜻 ‘낯익은 섬김’을 해석해 낼 수 있었다. 아직 낯설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거부 반응이 기득권, 관행, 적폐였다. 혁신의 대상이다.
 
우리 역사에서 자기 머리로 개혁을 설계하고 실천했던 사람은 목숨을 바쳤다. 정도전은 철학과 이론으로 천도를 설계했으나 철퇴를 맞았다. 허균은 율도국 건설을 꿈꾸다가 사약을 받았다. 박지원은 소설을 쓰면서도 개혁과 관련된 사안은 중국 얘기로 둘러대 살아났다. 1970년에도 김지하 시인은 〈오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다. 이들은 여러 100년이 흐른 뒤에야 목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개혁이 목숨의 대가임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저자는 경찰 재직 당시부터 기획, 전략, 실천에 앞장서 왔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 설계, 협업치안과 예방치안의 콜라보, 아픈 경찰관들을 위한 작은 배려, 교통경찰의 두 마리 토끼잡기, 초등학생이 건네주는 막대사탕,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범죄피해자의 아픔까지 보듬는 경찰’로 경찰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민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경찰 고위직 간부로서 자기 손으로 써서 취·이임사한 간부가 누구인지 경찰 간부는 다 안다. 2016년 제32기 경찰대학 학위수여식에서부터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졸업생 중 한 명이 초대되어 연설하는 전통을 창조하였다. 그 첫번째 선배가 정용선 경기경찰청장이었다. 그럼에도 경찰대학 후배들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저자는 2011년 한국 경찰의 대표 자격으로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세계경찰장회의에 다녀왔다. 귀국 길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찰에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였다. 이때 국제 경찰의 경쟁력을 비교한 다음 우리의 ‘5정 철학’을 고찰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나 더 짚자. 인사 검증 때마다 발목잡은 ‘보도내용’도 어느 정도 밝혀 두어야 뒤탈도 예방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장면 실랑이〉에서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경과’를 어딘가에서 풀어 주어야 복선의 효과를 독자의 감동으로 자아낸다.

나는 2007년 《작문연구》 제5집에 〈기능이 사고에 미치는 영향〉(블로그 ‘최명환의글집’ 참조)을 발표하였다. 〈협업치안과 예방치안의 콜라보〉는 이 논문의 실증적인 근거가 되어 주기에 충분하다. 실명제 교육을 위해서 하루 네 시간씩 자고 예비교사의 글쓰기를 낮밤으로 지도해 온 지난 15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그 결과를 《글쓰기 원리 탐구》로 펴냈을 때 세종대왕과 통화하는 기쁨을 누렸다. 저자는 충남·대전·경기의 어린이들과 학부모들과 정겹게 소통하였고, 심지어 상경 투쟁하려고 나선 노동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저들의 전의를 돌려놓는 데 솔선수범하였다. 그럼에도 뜻하지 않은 경찰교육원장 발령과 명예로운 퇴직이 시련으로 읽히는 까닭은 저자의 사명과 기획능력, 전략과 실천이 출중해서는 아니었을까.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어린 시절 ‘경기(驚氣)’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어 뜻 깊었다. 자당께서도, 저자 스스로도 아직 깨닫지 못했던 그 원인을 추론할 수 있게 되다니 글쓰기의 경이임에 틀림없다. 또 다시 국가의 부름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은 저자의 경륜이 뒷받침한다. 그래서 나는 70평생에 동지란 말을 두 번째 쓰면서 내 영감의 적중을 확신한다. 정용선 전 청장의 사명과 응답을 믿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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