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내포 동학 관련 3번째 시간이다. 이제 남은 것은 손병희 유허지다. 동학단체들은 이곳이 동학대도소라고 한다. 언제 어떻게 발견된 것인가? 그리고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것인가?

당진 띠울골에서 손병희선생이 피난 생활을 했다는 것은 천도교서에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사실이다. 기록으로는 확인되지만 띠울골이 어딘지 몰라 찾으려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천도교 중앙총부였다. 제헌의원이던 대호지 출신의 이종린 선생의 아들이고,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발간하는 『신인간』 편집위원이던 이동초 선생이 계신데, 손병희선생 유허지를 찾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다. 처음에는 손병희선생이 밀양 손 씨라서 밀양 손 씨가 많이 사는 고대 진관리 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해서 그쪽도 찾았던 모양이다. 당진 쪽에서는 이미 손병희선생이 수청리 인근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 있었고, 이러한 소문을 토대로 2012년 이동초선생이 연고가 있는 윤성의, 남광현 선생 등과 함께 당진 수청리에 있는 띠울골에서 손병희선생이 머물던 유허지를 최종 확인하게 된 것이다. 마을의 주민들은 이곳에서 손병희 선생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손병희 선생이 머물던 유허지는 1887년 지어진 집으로 확인되었다. 학계에서도 손병희 선생이 당진으로 피난해 살았다는 것은 기록으로 인정되는 것이니까 이견 없이 현재 위치를 손병희 선생 유허지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곳이 도시개발 지역으로 확정되면서 손병희 선생 유허지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과정 이전에 택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이렇다 할 보존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라서 안타깝다.

손병희 선생이 당진에 머물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수청리 띠울골에 손병희선생이 머물었던 시기는 1898년 8월부터 1899년 10월까지였다. 이 시기는 동학농민전쟁에서 패하고 난 이후 동학 지도부가 조선조정의 지목을 피하며 전쟁의 패배를 수습하고 동학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동학 지도부는 최시형 선생이 손병희 선생에게 동학의 도통을 전하여 손병희선생이 동학의 3대 대도주가 되어 손병희선생을 중심으로 동학을 재건해 나가던 시기였다. 이런 과정에서 1898년 3월 최시형선생이 원주에서 체포되어 6월에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이때 손병희선생은 최시형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당진 수청리를 찾아 숨어든 것이다.
  
당진으로 숨어든 이유는 당진 동학조직이 안전을 도모할 만큼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동학조직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당진의 경우는 내포지방의 동학농민군이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흩어지면서 당진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그대로 당진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동학조직이 보존된 당진에서 김현국 접주가 중심이 되어 동학 최고 지도부인 손병희 선생을 보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손병희 유허지를 동학대도소라고도 하는데 개념을 정확하게 구별하여 설명해 줄 수 있나?

동학은 동학농민혁명기에 대접주를 중심으로 각처에 혁명을 이끌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농민전쟁 시기에는 전투를 이끄는 지휘본부의 역할을 하였고, 평시에는 조선민중들의 의지를 모아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이후에는 동학조직을 재건하고 새롭게 도약할 준비를 대도소를 통해 했다고 볼 수 있다. 손병희 선생이 당진에 피난처를 만들고 피신한 곳이 바로 수청리 띠울 동학 대도소이다.

단순하게 손병희가 머물러서 의미가 있다는 것 이상으로 동학대도소라서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맞다. 손병희선생이 당진 수청리에 머물면서 피난살이만 했다고 볼 수 없다. 조선조정의 지목을 피해 가면서 동학조직을 재건하는 일을 했고,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나라를 구할 노력을 이어갔다. 손병희 선생은 당진에 머물면서 동학을 재건하고 천도교로 합법화 할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일제 강점기 당진의 사회운동에서 천도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 손병희 선생이 당진에서 피난살이를 하면서 동학조직을 재건하고 확산하였던 측면으로 이해할만 하다고 본다.
 
이렇듯 수청리 띠울 대도소에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현존하는 유일한 동학 대도소로 역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전쟁 이전의 동학 대도소는 여러 곳에 있고 또한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동학 대도소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도 없을뿐더러 수청리 띠울 동학대도소는 건물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손병희 유허지가 보존하기 힘든 상태로 알고 있다. 충남개발공사 관계자와 동학관련 단체들과 7월 12일 간담회를 가졌다. 관련 협의체를 꾸리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진행된 것이 있나? 동학 관련 단체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충남개발공사 입장에서는 수청지구 택지개발을 통해 수익을 남겨야 하는 입장이기에 손병희 선생 유허지를 보존할 때 들어가는 비용을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없다는 용역결과를 가지고 보존에 미온적이다. 용역결과의 객관성 여부를 떠나 모두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손병희선생 유허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건물은 낡고 누추해도 동학농민혁명 이후 유일하게 존재하는 동학 대도소라는 정신사적 의미를 고려해 보면 손병희 선생 유허지는 보존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당진의 역사적 콘테츠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우리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입장에서는 동학정신을 계승하고 선양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지라는 점에서 반드시 원형 보존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문화재의 보존은 있는 그대로 원형 보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러한 입장으로 충남개발공사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충남개발공사 입장에서도 우리의 요구를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지속적으로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당진에 있는 동학관련 유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보니 동학의 시작과 끝이 당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진에 남아 있는 동학관련 유적지를 어떻게 활용했으면 좋을지 의견을 말해 달라.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에서 벌어진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그 중에서 우리 당진에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적지가 집중해 있다는 것은 당진시의 입장에서는 행운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풍부한 유적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아시다시피 전라도 지방에서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유적지를 활용하여 다양한 행사와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당진에서도 이런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보존하고 역사적 콘텐츠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단법인 당진시동학농민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를 발족하게 되었다. 기념사업회 활동을 통해 동학과 관련된 사건과 유적지를 연구하고, 보존하고, 계승하여 선양하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당진시민들에게 역사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갖도록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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