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

면천읍성 복원사업은 박지원의 부각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년 전 쯤 박지원의 ‘박지원이 면천군수 시절 저술한 면양잡록’이 소개되면서 기왕의 면천읍성과 박지원의 스토리를 염두에 둔 읍성 복원사업이 설계되어 읍성복원과 저자거리 건설 및 박지원의 저작물인 칠사고 기념관 설치의 단계까지 이른다.

면양잡록은 박지원이 면천군수를 37개월 재직하는 동안 지은 저술로 과농소초, 이방익의 일, 함양학사루기, 거창오현진사기등과 충청감사와 주고 받은 문답과 함께 칠사고등이 수록된 방대한 양의 저작물이다.

박지원은 이외에도 인근 군현에서 발생한 각종 살인사건 검안서와 자료등을 채록하기도 한다. 예산현의 김분덕 익사사건과 평택두모포 변사사건 부여 변사산건등의 검안자료등이 어지러울 정도다.

칠사고는 박지원의 저작물로 단정할 수 없는 작품이다. 굳이 따지자면 박지원이 목민관의 지침서를 편찬하려 각종 자료를 모으던 과정의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칠사(七事)는 조선시대 지방 수령의 업무지침이다. 농업을 증진하고 호구를 늘리며 교육을 부흥하는 것은 조선 수령의 기본 삼사(三事)다. 이것에 쟁송을 균등하게 하고 군기를 관리 하고 세수를 늘리며 기민을 구제하는 등이 그것이다.

박지원은 함양현감 5년과 면천군수 3년등의 경험에서 목민관의 지침서가 꼭 필요하다 생각하여 칠사고를 구상하며 기왕의 목민고(牧民考) 계열의 책  십여종과 중국사서인 24사등에서 가려 뽑은 목민관의 지침을 모으기 시작한다. 면양잡록안의 칠사고는 박지원이 출간하려 기획한 책의 자료를 모으던 과정의 재료다.

칠사고가 박지원의 저작이나 편찬물이 되기 위해서는 박지원의 생생한 경험과 어떤 가치가 더해져 한권의 책으로 저술 되어야 하는 마지막 과정이 필요하다. 아쉽지만 지금의 칠사고안에는 박지원의 생생한 목소리가 없다. 다만 당대의 대지성이 8년여의 지방관의 경험을 살려 지방관아의 허다한 모순점을 시정하는 지침서를 구상했다는 것은 박지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로 손색은 없다.

결론적으로 칠사고는 완성된 책이 아니다. 박지원의 온전한 저작물로 평가하기도 저어하다. 이 대목에서 정약용이 떠오른다. 박지원이 면천을 떠날 때 정약용은 경상도로 유배를 갔다가 전라도로 유배지가 바뀌며 15년후 목민심서를 완성한다. 정약용은 칠사고와 비슷한 구성으로 목민심서를 쓰고 곳곳에 자신의 목민관 생활 중 보고 들은 기록은 삽입하여 가독력을 증가시킨다.

일례로 정약용은 금정찰방시절 홍주목사였던 유의(柳宜)에게 여러통의 편지를 보네고 답장이 없자 직접 찾아가 따진다. 유의는 다른 뜯지 않은 많은 편지를 보여주며 자신은 관장들과는 공식문서로 말하지 편지로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 정약용은 이런 사소한 곳에서 목민관의 기준이 달라짐을 말한다.

박지원이 이 유의와도 막역한 교분이 있다. 유의는 엉뚱한 면이 있던 사람이다. 정조가 벼슬을 내리자 응하지 않고 버티는 유의를 군사를 보내어 잡아오게 한 후 교지를 준적도 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관원으로 이름이 높았다. 유의는 한양에서 근무할 때 박지원의 주머니를 털어 술을 먹은적이 있다. 천하의 유의도 박지원은 편하게 여겼다.

박지원도 어쩔 수 없는 양반사대부다. 박지원은 칠사고안에서 조선은 양반사대부의 나라니만큼 지방도 사대부의 정신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고 그 방향으로 저술을 기획하고 실행한다. 다만 박지원의 혜안은 수리의 개발과 수차의 보급 벽돌제조와 도로의 건설등을 설파하는 점에서 빛난다. 박지원은 면천군을 속속들이 파악한 군수였다. 면천군의 역사자료는 인구 토지 세수 군역부분은 박지원의 기록이 전부라 할 정도로 치밀하고 정확하다.

박지원은 조선후기의 대지성이다. 그런 사람이 군수로 3년을 넘게 있었던 점은 지역의 큰 자랑이다. 그를 기려 사업을 벌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다. 그러나 사업을 전개하기전 사업의 이유와 타당성을 먼저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 칠사고가 그렇다. 번역은 되었나? 번역된 책자는 소개가 되었나? 그 책이 과연 박지원의 여타 저작물과 같은 평가물이기는 한가 그것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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