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송악면 가교리 신암사 전경
송악면 가교리 신암마을에 가면 고려말엽 면천 부원군 구예(具藝)의 부인 신씨가 세운 신암사(申庵寺)란 절이 있다.




▲ 암자 앞에 있는 7층 아기탑
송악면 가교리 신암마을에 가면 면천 부원군 구예(具藝)의 신암사(申庵寺)란 절이 있다.
지금부터 약 600여 년 전 즉 고려말엽에 이곳에 한 신암 구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벼슬길에 올랐지만 벼슬길에 오른 지 얼마 안가서 죽었다.


그 후 부인인 신씨가 그를 위로하고자 세운 것이 지금의 신암사인데 그녀의 성을 따서 신암사라 칭했다 한다.
구예(具藝)가 고려 20대 충선왕 때 판전의사(判典儀事)가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압록강에 당도하여 한 남자는 한사코 강에 뛰어 들려 하고 한 여자는 극구 만류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부하를 시켜 불러
“그대는 무슨 일로 강에 뛰어 들려 하나?”


“예, 저는 곡창직위를 맡아 보던 중 곡식을 축내어 고을 원님으로부터 곡식 값 3천량을 가져오라 하니 제가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삼천 냥이면 네 목숨만은 산단 말이냐?”
이리하여 삼천 냥을 주어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 후 귀국길에 이르니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 내외가 문객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3년간 문객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문객 생활을 떠날 것을 말하면서


“대감마님, 신위지기(身爲之地)는 정하셨습니까?” 하고 묻기에 “못 정했다.” 하니
“그러면 제가 보아 드리겠으니 한 번 보시겠습니까?”


“충청도 면천현에 삼혈(三穴)이 있는데 천자혈(天子穴)은 비룡상천이요, 삼대걸식후 구대입각지이고(飛龍上天 三代乞食後 九代入閣地), 지자혈(地字穴)은 금계포란혈(金鷄抱卵穴) 만대영화지지(萬代英華之地)이며, 인자혈(人字穴)은 옥녀탄금(玉女彈琴)이요, 서손대발복(庶孫大發福)입니다.”하니 지자혈을 정하겠다고 하였다.


또 면천부원군 구예 부인 신씨가
“이 땅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느냐?” 하니
“이 터에 절을 짓고 살면 훌륭한 터이고 구룡이 보호해 줄 터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씨가 구예(具藝)와 원나라에 동행하여 절을 지을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중국 숙소에서 꿈을 꾸었다.
부처님이 신씨 할머니를 따라 가겠다는 꿈을 며칠째 꾸었다. 그래서 근처에 절이 있나 알아보라고 하니 있다고 하였다.

그 절에 가니 스님이 마중 나와 “부처님을 모시고 가십시오.”하였다.
그래서 모셔오니 인도금동불(印度金銅佛)이었다. 그 후 구예가 죽어 문객이 잡아준 터에 묻히고 절 99칸을 짓고 연못을 파고 고동조개를 기르며 불공을 드렸다 한다.


그때 절을 「구룡사」라 하였다.
구룡은 덕머리, 쪽지머리, 방아머리, 쇠창머리, 나루머리, 굴머리, 서원머리, 개머리, 용머리로 중수할 때마다 호랑이가 항시 나타나 보물인 부처님을 지켰다.


▲ 보물 409호 신암사 금동삼존불상
이처럼 호랑이 발자국과 누운 자리를 나타내며 지키던 그 부처님이 1990년 987호로 지정되었다.
이 절은 본래 규모가 컸었는데 임진왜란 시 왜구의 침입으로 99칸이나 되던 것이 모두 소각되었다. 다행히 커다란 기둥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그전에 불상이 많이 있었지만 오직 하나만이 남고 다른 불상은 녹아 없어졌다.
사람들은 그 불상이 영험한 불상이라 하여 본관에 모셨다. 그런데 일제 때 일본군이 전쟁 무기에 쓰려고 불상을 뺏으러 오자 지금의 반촌리와 가교리의 약 600여 호의 백성들이 그 절을 지키기 위하여 남녀노소가 삽, 괭이 등을 들고 절을 삥 둘러싸고 지켜 결국은 일본군이 물러갔다.


그 당시 예산 수덕사도 불상을 빼앗겨 목불상을 해 모시기도 했다.
이 구룡사는 1969년 기유년에 신자들과 중수하고 나서 신암종중(申庵宗中)에서 회의 결과 신씨가 창건한 조그만 암자라 하여 「신암」으로 개명하였다.


이 신암사 우측 산기슭에는 두개의 묘가 있는데 그 위 것은 건(乾), 즉 하늘을 뜻하므로 남자인 구씨의 묘이고, 그 아래 곤(坤), 즉 땅을 뜻하므로 여자인 신씨의 묘가 된다.


암자 서쪽엔 본래 하천을 끼고 연못을 팠었는데 나라에서 연못을 못 쓰게, 즉 용을 살지 못하게 하느라고 우매한 백성들을 시켜서 .‘소금 백석만 넣으면 자손이 발복된다’하여 소금 300가마를 풀게 했다. 용은 짠 바닷물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렇게 크던 연못은 줄어들고 물이 마르면서 사람만한 큰 고동이 2개가 살고 있었는데 짠물에 못 이겨 황소만한 장수고동 하나는 신씨 무덤에 나와 죽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도 남아 있는 신암방죽 속에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암자 앞에 7층 아기탑과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는 옛날 어느 장군이 무릎을 꿇은 자국이 길이 약 40m정도, 깊이는 약 10m정도 패어있고 주먹을 댄 앞 바위엔 지름이 15cm정도, 길이가 10cm쯤 되는 구멍이 파진 것을 지금도 볼 수 있으며, 7층 아기탑은 신씨가 세운 후 5층대와 상층 대에는 옥보석이 들어 있다하여 도난을 당하였으나 그 후 다시 중수한 것으로 그 탑 위에 돌을 던져 세 번 모두 얹으면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탑이 옛날 쓰러졌는데 그때 사리와 서적, 부적 등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 절은 옛날에는 굉장히 컸었다.


지금 신암사 서쪽 산골에도 암자가 있어 지금도 그 골짜기를 절골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본관이 소각되었을 때에 타 버려 옛날 웅장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아담한 암자만이 남아 있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