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

박시순(朴始淳 1847_?)은 태종임금시절 맹사성으로 부터 1904년 박승준에 이르는 조선조 역대 면천군수 183명(필자확인)중에서 탁월했던 탑 군수 몇 명중 한 사람이다. 그는 1894년 10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불과 팔 개월 남짓 군수직을 수행하면서 면천에 남긴 행적은 박지원이나 김종수에 버금가는 치적을 쌓은 한편 군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목민관의 인식을 심어준 사람이다.

박시원은 면불일기(沔黻日記)로 자신의 면천 군수 재직 시간을 기록 했는데 그 속에서 면천관아의 정보를 담아내고 있어 주목된다. 면불의 뜻은 면천에서 새긴 수(繡) 라는 의미다. 박시순은 유한재(兪漢宰)가 팔각정을 짓고 임백헌(任白憲)이 옛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고 했다. 박시순은 유한재가 1713년 팔각정을 지었다고 했는데 유한재는 1801년 면천군수였으니 그것은 오해다.

유한재는 박지원 다음 다음번의 군수로 박지원과 지인지감을 나누던 유언호의 아들이다. 박지원은 개성 연암골에 살 때 개성유수로 부임한 유언호가 아들을 대동하고 자신의 집을 찾곤 했는데 바로 그 아들이 유한재다.

박시순은 자신이 퇴락한 군자정을 개축하고 주변에 대나무를 가득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했다. 이로서 면천읍성안의 각 관청 시설물의 이름을 어느정도 특정할 수 있다.   봉우헌(奉憂軒) 남헌(南軒) 조종관(朝宗館)  군자정(君子亭) 풍락루 반월루 원기루 원경루등의 유교의 향내가 가득한 관각의 이름이 선명하게 들어난다.

박시순은 스스로 면천군수를 자청해서 조정의 허락을 얻어 부임했다. 문과급제자로 촉망 받던 관료가 지방 한직을 자청하는 것은 드믄 일이지만 박시순은 선대조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 면천을 택해 부임하여 단숨에 지역의 기대를 끌어 모은다.

박시순은 조정에서 내려온 구휼미를 일대일로 백성들을 상대하여 직접 창고에서 배급하는가 하면 질서 없이 난잡하면서 민폐를 자행하는 아전들의 행정 처리를 일소하여 지역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박시순은 조정에서도 촉망받는 관료였다. 그는 면천군수시절 대원군 이하응은 물론 총리대신 외무대신등과 여러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특히 그가 부임하자마자 면천을 떠난 김윤식과의 편지도 주목 된다. 

박시순은 면천 14개면을 직접 돌면서 유지들과 백성들과 소통을 하는가 하면 14개면을 시로 지어 연구자들을 감동(?)케 한다. 박시순은 '면천을 떠나며 새로운 봄을 기다린다'는 수필을 남기기도 한다. 박시순은 면천에 있을 때 홍주의 김복한과 예산의 이남규등과도 소통을 한다. 둘 다 몇 년 후 홍주의병의 의병장이 되는 사람들이다.

박시순은 면천군수 재직 시 수 십 건의 민사 형사 사건 기록을 남겨 면천의 역사를 보다 튼실하게 뒷받침 한다.  그러함에도 박시순은 동학농민항전의 진압군인 양호순무영의 초모사로 발탁되어 지역의 충남 서부지역의 농민항쟁에 맞서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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