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읍성은 조선 세종 때 난상토론을 거쳐 완성된 관방시설이다. 당시 정승 황희가 면천보다는 서천이 급하다며 제동을 걸자 사군개척에 공을 세운 최윤덕이 직접 현장을 살피고 충청도 해안 방어기지로 면천을 주장 일사천리로 완성된다. 면천성은 관방시설로 민가가 대규모로 밀집된 성이 아니다. 위급 시 주민이 성안으로 대피하는 성격인지라 성의 둘레가 1천2백 미터의 소규모 성이다. 조선 초기 쌓은 비인남포성과 비슷하다.

면천성은 평지에 건설되어 면천군의 행정의 중심인 관아와 유향소 그리고 극히 일부의 가옥만이 성내에 있었고 읍민은 성의 남서문 일대에 촌락을 이루어 살았다. 성내에는 동헌 내아 질청 조종관 반월루 풍락루 형옥 군기고 사령청 노비청 마사(馬舍)등 40여동의 각종 시설과 대나무로 에두르고 연꽃으로 가득했던 군자지(池)와 그 위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아름답던 읍성의 모습이 각종 문헌에 보인다. 선조 때 사람 심수경이 노래했던 반월루, 당나라 시인 이구령이 노래한 당시(唐詩) 영주성 남문 원기루에서 취해온 원기루(遠奇樓)등 하나 하나 근거를 찾아보면 튼실하고 찰지다. 면천을 오고 갔던 심수경 김종수 박지원 김윤식등 조선의 유수한 명사들의 살아 있는 에피소드가 면천관아의 복원과 궁합이 맞는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본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본다.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재직한 시간은 37개월이다. 4년여에 걸친 조선 군수직은 예외적이다. 불과 1년에 불과했던 군수직을 오래도록 한 이유는 박지원에 대한 정조임금의 특명 때문이었다. 강압적이지 않고 서학을 이론으로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박지원이 적격이었고 당시 면천이 서학세력이 강했던 탓이다. 연암은 면천에서 많은 성과를 낸다. 그중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 한다.

연암은 면천에서 아전(衙吏) 유한집(兪漢緝)을 주목했다. 연암은 자신의 아들 박종채와 동년배인 유한집의 문재를 알아보고 아들과 함께 학문을 지도했다. 유한집은 훗날 문학으로 성취를 하여 대동시선과 풍요삼선등 조선의 유수한 시선집에 작품을 수록 하는 문인으로 성장 한다. 유한집은 훗날 면천에 7년을 유배와 있던 김윤식의 면양잡록에 모습을 들어낸다. 유한집의 손자 윤지환이 면천 아전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시책을 들고 와 평을 요구한 것이다. 유한집의 동생 유학금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박지원이 양양부사로 이임할 때 양양으로 따라가기도 했다. 박지원의 그림자가 그만큼 크고 짙다.

면양잡록을 잘 읽으면 생생한 면천의 역사가 보인다. 당시의 군수 좌수 이방 형방등의 실명이 등장하는가 하면 당시 영탑사를 왕래하던 승려들의 이름과 삶의 모습이 보인다. 영탑사 아랫마을 사람들의 순박성도 느낄 수 잇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단초다. 면천읍성 복원은 이것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면천읍성과 관아복원 사업은 기대되는 사업이다. 그러나 성안에 저자거리를 조성하는 것은 재고가 필요하다. 성내에 저자거리가 있었다고 보나? 한면이 3백미터에 불과한 면천읍성 성격과 구조상 그것이 가능한가? 성내의 상가는 아마도 일제시대에 형성됐을 것이다. 조선의 문헌은 면천읍성 남문밖에 백성들이 모여 장시를 이룬다는 정도다. 관광객들의 눈요기와 상품판매를 목적으로 한 육의전 같은 저자거리를 재현한다는 것은 사업의 전도가 바뀐 것이다. 그러함에도 면천읍성의 복원은 기대되는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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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역사자료 2

면천군민들의 납세거부운동

이편지가 생산된 1903년 자료인 탁지부각부등록에 당시 세금징수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면천군민들의 기록이 나온다. 면천군민이 신식세금징수 방법의 이해부족으로 각 면별로 조직적으로 납세거부운동을 하고 국고운송 차량을 전복할 우려가 있으니 호위방법을 강구하고 특히 면천의 불만인 왕실궁가(왕족)의 세금이중징수를 엄금한다는 내용이다.

면천은 왕실궁가인 선희궁이 대대로 염정세를 부과해오고 있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모친인 선희궁이씨 집안에 면천의 해안을 중심으로 소금과 해물등에 대한 세금징수를 허용한 탓이다. 인근 당진도 해안 목장을 중심으로 효혜공주(중종과 문정왕후의 딸)가에서 대대로 세금을 징수해온 것과 비슷한 경우다.

이 편지와 함께 발굴된 연속된 편지에서 면천군수가 아산 명사관(明査官)으로 출장을 다녀왔다는 내용이 보인다. 1903년 면천군수 '이세우'가 아산 호서교당 봉기사건을 조사하라는 조정의 지시를 받고 다녀온 기록이 황성신문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면천군수가 이세우라는 것이 특정된다. 이세우는 능력이 출중하여 홍주의 독쇄관으로 임명되어 파견도 되는 인물이다.

1896년 갑오경장 이후 조선은 온갓 잡박한 세금징수 방법을 내장원으로 통일시켜 징수하고자 했다. 이 편지의 내용은 내장원의 세금징수와 기존 세금징수 방식이 갈등을 일으키는 과정이고 그 속에서 면천지역의 대지주가 곤란한 처지에 빠졌고 그가 한양에 선을 대고 곤란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이 자료의 내용이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안지영’으로 생각된다. 안지영은 당시 공주 '김갑순'과 더불어 호서지방의 대지주로 면천 합덕지역에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안지영은 한양의 유력가들과 밀접하게 선이 닿아 거의 군수와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에 부과된 세금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면천군의 의회격인 향임의 좌수가 군 아전들의 복장을 빙자 세금을 걷는 장면이다. 당시 조선의 지방은 관아에서 사용하는 물품까지 군민들에게 인정세란 이름으로 징수하는 등 문란한 당시의 세금문제의 단면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이방의 인식이 조금 다르다. 사실 조선의 관아의 실력자는 호방이다. 군수가 자리를 비우면 대행을 하는 자가 호방으로 세금징수 권한에서 나온  힘이다. 조선관아의 아전이란 이름의 직임은 고도환된 전문직이다. 어느정도의  한문의 소양이 있고 사무 문자인 이두에 능통하고  다년간 행정사무에 익숙한 사람들로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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