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호 칼럼■

 얼마 전 후배를 만났을 때 일이다. 곱게 포장한 봉지 두 개를 들고 나타난 그가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내게 “형수 갖다 드리슈. 오다가 내꺼 사면서 하나 더 샀슈.”라고 하더니, 계속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내 표정에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이 화이트데이 아니우, 형이 선물 준비했을 리 없지 않수? 나라도 챙겨야지, 아, 그리고, 형수한테는 형이 준비했다고 하슈. 또 곧이곧대로 말하지 말고.” 그날이 3월 14일이었다.
 그날 집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분명 내가 특별히 생각해서 사온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마누라가 “에이 거짓말, 또 누가 줬겠지. 생전 안하던 짓(?)을 갑자기 할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유, 그게 뭘까?” 라고 하는 바람에 그냥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참 싱겁기도 하지.(난 왜 이렇게 거짓말을 잘 못하는지 원)
 화이트데이(White Day)라는 것이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화이트 초콜릿이나 사탕을 선물하는 날이라지만, 지나간 2월 14일 그 밸런타인데인가 뭔가 하는 날에 내가 마누라에게서 받은 것도 없다. 우린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냥저냥 살아오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피장파장이다.(이 말이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다)
 항간에 유행하고 있는 그 무슨무슨 데이라는 것이 참 많기도 하다. 내겐 너무나 낯설기만 한 그것들의 시작은 아무래도 그 밸런타인데이(Valentine Day)가 아닌가싶다.
 3세기경, 출정하는 군인들의 금혼을 명한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에 반대하다 2월 14일 순교한 성 밸런타인 주교를 기념하는 성 밸런타인 데이(Saint Valentine‘s Day)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날은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는 날이었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는 발상은 일본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제과업자들의 상술에 지나지 않을 뿐 별 의미가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매월 14일을 장식하고 있는 그 무슨 데이의 면면들을 보자.
 1월에는 연인에게 1년 동안 쓸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Diary Day. 4월에는 짝 없는 남녀가 모여 자장면을 먹는 Black Day. 5월에는 연인들끼리 장미꽃을 주고받는다는 Rose Day. 6월에는 로즈데이에 장미를 주고받은 연인들끼리 키스하는 날이라는 Kiss Day. 7월에는 Ring Day라고도 하여 은반지를 주고받는 Silver Day. 8월에는 연인과 함께 삼림욕을 즐기는 Green Day. 9월에는 연인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나눠 갖는 Photo Day. 10월에는 연인이 함께 포도주를 즐기는 Wine Day. 11월에는 연인이 함께 영화를 보고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Movie & Orange Day. 12월에는 연인이 서로를 깊이 안아주는 Hug Day 등등이 있다.
 뿐만 아니다. 날짜가 겹치는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만든 날들로 11월 11일을 빼빼로데이. 2월 22일을 커플데이라고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기념일을 타깃(target) 삼아 각종 이벤트로 자사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Day Marketing이라는 지나친 상술이 날조해낸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애교스럽기도 하고 수긍이 가는 바도 있다.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은가.
 서로가 작심하여 약속하고 의미를 담고 정겨움을 나누고, 그래서 잠시 시름을 잊고 즐거울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고 웬만한 것들 좀 용서가 되지 않겠는가. 이 적은 여유와 낭만을 억지라거나 사치라고만 일축하질랑 말자.
 그러나 이 날을 지내는 모양이나 행동양식에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
 우선 들고 싶은 것이 선물의 과대포장이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그럴듯하게 포장된 40,000원짜리 선물용 초콜릿 바구니의 내용물을 가지고 원가를 따져보니 15,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과대포장의 정도가 도를 한참 넘어섰다. 이런 것들이 순수를 좀먹기 때문에 우리 청춘이나 소시민의 작은 위안과 즐거움마저 퇴색되고 욕먹게 되는 것이다.
 이건 소비의 미덕도 아니다. 낭비일 뿐이다. 이런 상혼이 바로 비난받아 마땅한 악덕이다.
 반성은 우리 자신이 먼저 해야 한다. 말로는 내면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모든 평가 이전에 외모에서 시작되는 선입견으로 판단해버리는 외모지상주의가 여기에도 적용되지나 않는지.
 다음으로 들고 싶은 것은 정성이다. 정성이 결여된 것은 의미가 없다. 포장만으로는 사랑도 우정도 담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연하장이나 크리스마스카드를 예로 보자. 어렸을 적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만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만든 것이 문구점에서 산 것보다 너무 촌스럽고 볼품이 없다고 여겨져 집안에서나 나누어 주고서, 정작 내 정성을 보내고 싶었던 상대에게는 문구점에서 울긋불긋 비까번쩍하는 놈으로 골라 사서 보냈던 기억. 참 허망한 노릇이 아닌가. 알맹이 없는 껍질 놀음을 논 것이.
 이제서야 그 촌스럽게 느껴졌던 그것에 담겨있던 정성과 존경과 사랑과 감사가 보이는 듯하다. 참 일찍도 깨닫고서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이 아둔을 어찌할꼬? 대답은 한숨이다.
 이 많은 무슨무슨Day들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우리가 의식을 바꿔보자. 선물은 과대포장을 배격하고 정성과 존경과 사랑과 감사를 담아 손수꾸리기를 원칙으로 삼아보자. 그리하여 비난을 잠재우고 우리 나름의 미풍양속으로 존속시켜나가자.
 금년 밸런타인데이에도 나는 마누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딱히 서로 주지 않고 받지 않기로 약속한 바도 없는데. 작년에도, 그 전 해에도, 또 계속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주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니 마누라라고 나보다 썩 나을 것도 없다. 이 대목에서 보면, 그래서 부부란 닮는다고 하는가 보다. 우린 그저 마음만 주고받을 뿐이다.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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