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초락도 전경
석문면 초락도는 「푸레기」라고 불렀다. 삼봉 제1제방과 삼봉 제2제방의 공사완공으로 삼봉저수지를 만들면서 섬이었던 초락도가 육지가 되어 현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고려 때 육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섬을 개간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재미있는 지명 전설들이 있다.



석문면 초락도는 「푸레기」라고 불렀다. 삼봉 제1제방과 삼봉 제2제방의 공사완공으로 삼봉저수지를 만들면서 섬이었던 초락도는 육지가 되어 현재에 이르렀는데 1971년 이전엔 섬이었다.


옛날에는 통나무를 파서 구유처럼 만든 배를 타고 석문을 다녔는데 육지라야 바로 바라다 보이는 해변으로서 푸레기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물새들이 서식하기 좋은 곳으로 일찍부터 당나라 배들이 이 섬 앞을 지나갔다 한다. 그럴 때마다 배에서 바라다 보이는 지형이 아름다워 한 번쯤은 올라오고 싶은 곳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육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섬을 개간하였다 하는데 초락도 가까이에 있는 탕주막섬에는 바닷물이 빠지면 해안가에 돌절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일찍부터 선사인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보인다.
초락도의 지명과 관련한 전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풀떼기와 초락도

어느 날 불문에 오래 몸담았던 도승 한 분이
“이 섬은 앞으로 많은 사람이 정착해서 살 섬이다.”
라고 하면서 섬에 와서 초막을 짓고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그 때 육지에 살던 한 부부가 매일 바쁘게 아등바등 사는 것이나 죽어 어디로 가는지, 또 죽으면 그대로 땅속에 썩어 없어지는 것인지. 스님들은 죽어서 극락세계에 간다는데…
그 부부는 언젠가는 스님을 만나 사람이 죽으면 썩어 없어지는지, 아니면 죽어 어느 세계에 가서 살게 되는지 물어 보고 싶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그 섬에 땅을 일궈 곡식을 부쳐볼 생각으로 통나무배를 타고 들어와 농사를 지었다.
하루는 산에서 바가지 두들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박달나무를 두드리는 것 같기도 하여 그 곳으로 올라갔더니 초막 하나가 보였다.


그들 부부는 조심스럽게 초막가까이 갔다. 머리를 박박 깎은 스님이 나무를 두드리며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스님임을 알고 염불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스님은 사람이 사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고 사람은 모두 평등해 모두가 부처님 자식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마음속에 있다고도 했다.
또 착한 일을 하면 극락세계에 가고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도 했다.


그들 부부는 그 말이 가장 뜻 깊게 받아들여졌다. 스님과 헤어져 내려오면서 앞으로는 좋은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날부터 고기나 비린내 나는 음식은 먹지 않았다.
그리고 첫 번째 착한 일로 그 스님에게 음식을 갖다 주기로 했다.


이튿날 그들은 밥을 싸들고 일찍 통나무배를 타고 초막으로 갔다. 그 스님은 역시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 이튿날도 그들은 밥을 싸들고 가서 초막 안에 넣어 두고 일터로 나왔다. 이런 일이 사흘째 되던 날 밥을 놓고 내려오려는데


“불문에 들어 도를 닦다보면 많은 음식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밥보다 곡식을 갈아 만든 죽을 사흘에 한 번 정도 먹어도 능히 살 수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 다음 날부터 잡곡을 맷돌에 갈아 사흘에 한 번씩 죽을 쑤어 초막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근 1년쯤 지났을까 하루는 스님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날부터 그들은 초막에 눌러 앉았다. 기진맥진해도 사흘에 한 번씩 죽만 마셨다. 그렇게 긴 세월을 죽을 먹으며 불도를 닦았다. 그렇게 불도를 닦아오던 어느 날 금강산에서 온 스님이 머리를 깎기를 청했다. 그 부부는 그의 말에 따라 머리를 똑같이 깎고 남편은 지리산으로 아내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들 부부가 평소 죽을 쑤어 스님께 공양하듯 착한 일을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이 베풀어 그들의 소원도 이루었고 유명한 스님도 되었다.


그들이 이 섬에서 스님에게 공양했던 곡물 죽, 또 그들이 먹던 죽을 사람들은 「풀떼기」라고 불렀다.
그것이 「푸레기」가 되고 그 푸레기가 한자 지명화 되면서 「초락도」라고 부르게 되었다하나 아직 정설로 확정된 것은 없다.


② 깍다귀

대호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속의 섬이 버린 초락도의 해양고지에는 옛부터 명주 세 꾸리를 다 풀어도 끝이 안 닿는 깊은 곳이 있었다.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다 나가도 이곳만은 푸르딩딩한 빛이 도는 곳이었다. 그곳에 날이 따스해지고 불그스름한 노을이 지는 날이면 이무기도 나타났다고 한다.


이곳에 옛날부터 유난히 깍다귀(깍대기)가 많았는데 그와 관련한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천태산(천산) 마귀 할머니가 세상의 넓은 바다를 다 돌아다녀도 속곳바지(고쟁이바지 위에도 입는 옷)밑이 닿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진땅 석문면 초락도리 해양 고지에 오니까 속곳바지가 젖었다.
속곳바지가 젖자 너무 화가 난 마귀할멈은 깍다귀 벌레를 여기다 풀어 놓아 깍다귀 벌레가 초락도 해양고지 일대에 무지무지 많았다 한다.


그러나 대호방조제가 쌓이면서 깍다귀 벌레가 줄었다. 하지만 지금도 흐린 날이면 깍다귀 벌레가 많이 나타난다 한다.

③ 절터 느티나무

초락도리 산 63에 위치해 있는 이 느티나무 수령은 700년이다.
수고(樹高)는 15m, 둘레는 3.2m이고, 그 나무 반경이 50㎡인 노목으로서 초락도리 홍씨 종중에서 관리하는 도 지정번호 79, 고유번호 8-79인 보호수이다. 이 느티나무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하나는 고려 말에 낙도사(落島寺)라는 아담하고 조용한 절이 이 산에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평온한 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대웅전에 모셔둔 불상이 매일 밤 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몇 달이 계속되자 이 절에 있던 스님들이 점차 절을 떠나가서 주지스님과 몇몇 스님만이 남아 불공이 부족한 탓이라며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면서 부처님께 용서를 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지스님이 불공을 드리려고 새벽에 대웅전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불상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주지스님이 들고 있던 등불을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광풍이 불어 닥치면서 순식간에 대웅전을 태우고 불은 계속 번져 낙도사를 모두 태우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절 뒤의 암벽에 있던 느티나무 두 그루만 남게 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말에 해운암(海雲庵)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200년 전에 스님이 불 땐 재로 잿물을 만들다가 실수를 하여 불이 나 절을 태웠다고 한다.


그래 그 절 뒤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나무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 나무속에서 웃음소리가 났다고 하며 4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무 동공 속에서 호랑이(살쾡이)가 살았다 한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이 마을 주민들은 재난을 면하기 위하여 매년 정초에 이 나무들에게 제사를 지냈다는데 근년에는 이 절터에 기도원이 들어섰다.


▲ 푸레기 낙지는 아니지만 맛이 일품인 세발 당진낙지
④ 푸레기 낙지

초락도리는 섬이었던 관계로 사면이 광활한 갯벌에서 갯지렁이와 낙지, 굴, 바지락 등이 생산되었다.
그중에서도 갯지렁이는 일본 등지에 낚시 미끼로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 들이는데 한몫을 하여 연간 판매량이 초락도 전체 논에서 생산되는 쌀값을 훨씬 능가했었다.

또한 낙지는 크고 그 맛이 좋아 관내는 물론이고 서울과 인근 예산·온양·천안지방에서도 「푸레기 낙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우리가 그 지방 모르는 음식점에 가면
“이게 당진 푸레기 낙지요.”


라고 권고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나 지난 1984년 대호방조제공사가 완공된 후 해류의 회유가 안 되어 생태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 지금은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어 어민의 주요 소득원이 없어졌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출병했던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어느 날 선조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며 중국에서 가져온 계수나무 벌레를 술안주로 내놓았다.

이여송은 선조가 모양이 징그럽고 냄새가 나 비위가 상하여 계수나무 벌레를 먹지 못함을 보고 소인국 사람들은 먹을 수 없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옆에서 이 모습을 배종했던 오성(이항복)대감은 다음날 이여송을 초청하여 담례 연회를 열고 당진 초락도산 푸레기 생낙지를 파발마로 운송하여 술안주로 내놓았다.


이여송은 생낙지가 쩍쩍 붙어먹지도 못하였다. 오성대감은 이것은 소인국 사람밖에 먹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이여송의 기를 꺾어 놓았다는 「푸레기 낙지」의 명성도 전설과 함께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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