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전봉희

필자의 고향은 당진군 합덕읍 내동마을이다. 自意 反 他意 反 심정으로 실향민으로 살다가 금년 구정에 타향살이 꼭 오십 년이 흐른 후, 신례원을 거처 합덕방죽 수리박물관 간판을 바라보며, 고향마을 친구 집을 방문하기 위해 합덕 버스 터미널에 하차하니 시내버스 노선이 없어 뚜벅이 族 신세로 걸어서 마을 어귀에 당도하니. 무엇이 허전하다. 둘러보니 매봉산이 보이지 않는다. 산업단지가 원인이다. 사실 매봉산은 이 마을에는 매우 중요 하다. 마치 어깨와 같이 차가운 북쪽바람을 막아주는 脣齒 역할을 하며 마을 보호하였다.

매봉산 줄기는 한남 금북정맥 줄기다. 백두대간 길목 속리산 ‘천황봉’에서 분리되어 안성의 ‘칠장산’ 삼거리에서 북쪽 줄기는 한북정맥으로 보내고, 금북정맥은 천안 ‘광덕산’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을 거처 광천 ‘오수산’에서 우회전으로 비틀고. 서산 가야산 ‘석문봉’을 빚어 놓았다. 이 가야산줄기는 고북면에 남매가 힘을 자랑했다는 문다래미 산성이 유명하고, 근처에 현대 계량형기의 모습 말 통형 됫박형의 조형물 있는 마대 골이 있다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계량단위는 섬(石)단위다. 신문명이 들어올 때를 암시한듯하다. 다시 지류는 홍성군 ‘용문봉의 그림을 만들어 수많은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내포평야’를 개설하여 오늘날 ‘내포시’의 일등공신이다.

‘가야산’ 줄기는 풍수지리 金科玉條로 여기는 陰 宅地 대명사로 여기는 白眉 이대천자 자리 남연군의 묘지가 자리하고 ‘광천리’ 일대는 온천지역이다. ‘석문봉’에서 내려오면 덕숭산 자락에 천년 고찰 수덕사가 자리하며 ‘일락산’, 밑에 마음을 맑게 준다는 ‘개심사’가 존재하며 강뎅이 골짝에는 백제 상인들이 당 나라와의 해상무역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는 ‘삼존불’이 존재한다. ‘삼존불’은 햇빛의 강도에 안색이 변해진다고 한다. 백제인 들의 예술의 극치이다.

여기서 금북정맥은 ‘팔봉산’을 지나 안흥만 골프장 부근에서 생을 마감한다. 매봉산은 ‘일락산’의 분지를 따라 봉산면을 두루 살피고 고덕면 오추리 마을 뒷산 ‘황 소재’에서 당진군과 예산군의 경계로 분리시키고 내동마을 품에 안기어 수호신으로 희로애락을 지냈다.

유년 시절 필자는 봄에는 칡뿌리를 여름에는 산딸기를 채취하여 먹으며 정상에서 저 건너 장항선 철도 기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숨을 헐떡이며 달리다가, 신예원역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서울로 출발하는 광경을 보며 도시를 동경하기도 하고 浩然之氣 을 기르곤 하였다.

이렇게 강산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많이 변했다. 성인들은 산은 산이요 물이라는 표현으로 세월의 유구함을 표현했지만, 현실은 현대 문명의 변혁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 많이 변한다. 서운함을 잊고 발길을 돌리어 친구를 조우하니 마을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足히 수백 년 동안 영화를 누리던 고가는 주인을 잃었는지 드높던 담장은 힘을 잃고 넘어가고 있어 폐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잘 간수하면 마을 이익에 도움이 될 성 싶다. 例로 농촌마을 교육장 이라든지 공동 마을 식당을 개설하여 노인 인력을 활용하면 외지인들이 견학을 오지 않을까, 이 마을은 전형적인 시설 채소 단지 마을이다. 그러려면 시내버스 로선이 들어 있어야 필요한데 없어서 그 점이 아쉽다.

매봉산이 없으니 성동리 산성에 올라 잠시 옛날을 회상하여 합덕 방죽을 응시 하며,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

합덕방죽

합덕방죽은 이름이 다양하다. 합덕연지. 연지. 하호. 연제 등으로 불린다. 이는 여기에 연꽃이 많았던 관계로 연관성이 많아 보인다. 필자는 여기서 특징. 필자의 유년시절 관계. 실용성. 역사의 존재감을 短文 형식으로 拙筆로 생각하여본다. 短. 고향 생각을 하면서이다.

합덕방죽이 조성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천오백여년의 역사의 숨결이 잠겨 있다고 추측된다. 이 사실은 大 합덕리와 성동리 입구 삼거리에 관련 비석들이 존재하는 사실을 필자는 유년시절 기억 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이는 같은 시기에 축조된 전북 김제시 벽골제와 비슷하다. 보존 방법은 벽골제가 우수하다. 여기는 가을이면 지평선 축제를 성대히 거행하여 지역주민들의 화합을 다짐한다. 합덕방죽은 이러한 점이 없어 빈약하다.

축조 방식도 다르다. 벽골제의 제방은 일직선이다. 합덕방죽 구불구불 뱀 사 형 이다. 이는 이지역의 지형과도 무관하지 않다. 석축 방법도 직각의 형태이다. 이는 중국식 토목을 접목 시켰다는 설이 존재 한다. 제방 正 가운데에 龍泉이란 웅덩이가 있었다. 여기는 물 빛깔이 하루에 매시마다 변한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은 모르겠고, 아무튼 이 지역 지형은 용의 형국이다.

용의 머리는 우강면 창리에 있다. 그 자리가 영험하여 묘지를 설치하면 근방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무척 금기시 했다고 한다. 지금은 농수로 터널이 통과하여 효능을 상실한 상태이다. 용천을 지나서 꼬리 부분은 예산군 신암면 용산이다. 여기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심은 ‘白松’ 한 그루라가 유명하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소풍으로 관망 하면서 신기했다. 부근에 암자도 있고 뒷동산에 장군들이 장기를 두었다는 바위에 음각으로 새긴 장기판을 본 기억도 새롭다.

필자는 유년시절 여름방학이면 저수지에 농업용수가 관개되면 연꽃이 만발한 진흙을 헤치며 연꽃을 꺾어 여자 친구 머리에 화관을 얹어주고 연밥을 따먹으며 가운데 섬에 올라 놀다가 보면 몸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된다. 현대 진흙 머드팩을 즐기고 둑으로 나와 수문에 시원하게 미역을 감으며 피로를 풀었다.

단연 농업용수가 으뜸이다. 면적은 오만3천여 평의 넓은 면적에 6개 마을의 몽리를 두고 9개의 수문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주민들 풍요롭게 만들어준 고마운 존재였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방류 하면 야간에 농부들이 논에 양수 하기 위해 불을 켜놓는 광경은 반딧불처럼 반짝였다. 현재는 예당저수지. 삽교천이 개발되어 효능을 잃고 농지로 사용 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없어진 셈이어서 아쉽다.

합덕방죽은 김제 벽골제와 달리 군사적 역사가 쉼을 쉰다. 백제가 멸망하고 유민들이 지금의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 임존 산성을 축조하고 부흥을 꾀한다. 왕족인 ‘복신’과 승려인 ‘도침’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백제의 후예 왕족 출신 ‘풍’을 옹립하고 세력을 축척하다가, “복신”과 “도침”의 알력 싸움으로 실패하게 된다. 지금도 봉수산에 성터가 있으며 많은 등산객이 방문한다. 특히 금북 정맥 길목 이다. 합덕 방죽은 이때에 중심적 역할을 한듯하다. 첫째 평야이기 때문에 군량미를 조달하며, 성동리에 산성을 축조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며 말 목장으로 사용하여 군사적으로 유용하게 사용 하였던 같다.

야화는 긴 역사 덕분에 민초들과의 대화가 담긴 설화 많이 전해진다. 제방엔 많은 벗 꽃 나무가 식재 되었다. 원래는 붕괴 방지의 목적 인데 봄철 개화기엔 상춘객들이 많았다 한다. 달밤이면 방죽에서 올라온 가물치들이 벚꽃 나무에서 구렁이와 교미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한다. 가물치 피부색갈이 구렁이와 비슷하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도 야화로 전해오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이때 왜군은 부산진성을 공약 하고 동래산성을 점령하여 파죽지세로 문경새재를 거처 충주 달래강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을 물리치고 서울로 진격 한다. 그 당시 합덕 방죽에서 “김복선”이란 낚시꾼이 있었다한다. 이 사람은 천문 지리에 밝고 예언가인데 신분이 常民이라 出仕를 못하고 시문과 학문으로 소일 하였다한다. 이 사람이 소식을 듣고 동래출신 성명미상 白丁을 출전시키면 3일 평정이고 신립장군은 필패이고 “이순신” 장군은 7년 평정이라고 진단 했다한다. 그의 예언대로 전쟁은 칠년의 ‘이순신’ 장군의 장기간 인내 끝에 ‘今臣戰船 尙有十二’이란 명언과 함께 단 12척 전함을 가지고 133척의 왜구의 전함을 전멸 시키고 명량해협 (오늘의 진도 울돌목)전투에 승리해 세계 유일의 해군 전투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나라를 구하여 오늘날 젊은이들이 하면 된다는 희망과 矜持의 感을 심어주고 있다.

그 당시 천민들은 정식 이름이 없었다. 필자는 유년시절 무슨 뜻인지 하며 의아했다. 그런데 이십년 전 백두대간 산길을 답사하며 이야기를 상기하여 보았다. 여기서 수수께끼가 풀리는듯했다. 백두대간 답사 길목 충북 괴산군 ‘이화령’이란 산 고개는 박달재와 함께 충청도 경상도 을 잊는 유일한 길목인데 지금은 터널이 통과하여 옛날 영화는 사라지고, 정상에 고추 집산지 상징인 고추 조형물과 비어있는 주차장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비틀어 첩첩산중 怪巖怪石의 秘境을 감상하며 6.7시간을 산행하면 넓은 주차장에 문경새재 3과문 조령관이 영접하여 준다. 여기가 그유명한 조령 문경새재이다. 우회전하면 조곡관 주흘관이 나온다.

이 길목은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처 한양 가는 길의 직선로여서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길 로 이용했다. 양 옆은 협곡이라 군사상 要塞이다. 왜군들은 무방비의 이 要塞를 통과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여. 삼천리금수강산을 침략한다. 만약 신립장군이 여기서 전투로 막았으면 필승이었다고 후세의 학자들이 공감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단견으로 동래성 사람은 그 지리를 터득 하였을 터이고 그래서 그의 주장이 타당성을 띠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 후로 유비무환 책으로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을 축조하고 대비한다. 조곡관에서는 慶尙道 新舊 감찰사가 직인을 교환하는 交龜亭으로 사용했다 한다.

아무튼 역사는 수레바퀴 마냥 돌고 돈다. 현재도 미래에도 인재 발굴에 공평함이 제일의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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