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용 삼 / 월간조선 편집국장

 

▲ 김 용 삼
◆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광해군이 가장 신경을 쓴 분야는 군비증강이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 8월 17일 임금은 비변사에 누르하치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을 연구하라는 명을 내렸다.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는 여진의 각 부족을 정복해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광해군 정권 초기에 만주 동북지역을 통일하고 만주문자 창제, 법률 제정 등을 추진했다. 광해군 8년(1616)에는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후금(後金)을 건국했다. 12세기 만주에서 세력을 날리던 금(金)나라의 후예임을 선언한 것이다.

광해군 즉위년 8월 17일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비변사는 “누르하치가 동북 지방의 여러 지역을 삼키고 병력이 한창 강성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그 대비책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 성을 지키는 군졸의 수가 많아야 200~300명이고, 작은 보는 20~30명뿐입니다. 적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정주, 안주의 성과 곽산, 숙천의 두 산성을 감사와 병사가 살펴본 다음 어느 곳을 먼저 수선하고 어떤 장비를 설치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겠습니다.

평양과 영변은 주요한 요충이기 때문에 군기 수선과 군량 비축 등의 일을 ‘기효신서’(명나라 척계광이 지은 병서. 왜구가 명나라 해안을 침입할 때 척계광이 새로운 진법으로 왜구를 격퇴한 경험을 기록한 책)에 기록된 대로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적의 대군이 밀려와도 능히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조사 후 상세히 보고드리겠습니다.”>

광해군은 재임 2년 1월 22일 군기시와 훈련도감에 “그동안 제조했던 각종 군 장비를 종류별로 기록하고, 총력을 기울여 군사 장비를 제조하라”는 명을 내린다. 광해군 2년 11월 8일에는 장만(인조반정 이후 도원수가 되어 이괄과 함께 서북 방어를 담당한 장수)이 오랑캐 지역의 지도를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 장면이 목격됐다.

<“신이 북쪽 국경지대에서 4년 동안 근무하며 오랑캐 지역의 산천을 두루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어를 알면서 오랑캐에 잡혀갔던 사람들과 이 지역 지리를 잘 아는 군사들에게 거리의 원근과 산천의 형세, 부락 이름 등을 상세히 물었습니다. 또 오래 근무한 고참병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참고해 높은 곳에 올라가 그 지점을 확인하면서 오랑캐 지역에 관한 작은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감히 이 지도를 바치니 조용할 때 보셨으면 합니다.”>

지도를 받고 흡족해진 광해군은 “나라를 걱정하는 그대의 정성이 가상하다. 지도를 옆에 두고 유념해서 보도록 하겠다”고 치하했다.
광해군 5년 12월 21일에는 비변사에서 누르하치 세력에 대비하여 변방을 수비하는 방법을 건의했다. 이 시절 이미 누르하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명나라 조정에서는 정벌을 논의하고 있던 때다.

<“노호(누르하치)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우리나라에 우환이 될 것이라는 점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같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변방에는 믿을 만한 일이 없고 조정에는 강구하는 대책이 없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군사를 첨가하는 일도 그만둘 수 없는 형편에 있으나 각종 무사와 군병이 적은 것도 아니니 병조에서 정예하게 뽑아 전란에 대비하게 하소서.

그리고 양식부족 문제가 서울이 더 심하니 군대가 동원되면 무슨 양식으로 이들을 먹이겠습니까. 이 문제도 호조에서 별도로 조치하여 대비하게 하소서. 또한 무장 중에서 2명을 뽑아 서북 양도에 배치시키면 장비 단속이 군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건의에 대해 광해군은 “외방 다른 지역의 포수와 살수를 숫자에 맞게 뽑아 먼저 들여보내 완급에 대비하게 하고, 본사에서 만든 조총을 수를 맞춰 서북으로 나눠 보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조선의 정황은 누르하치의 움직임이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외교관계를 재개한 일본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재임 8년 8월 9일 북방의 오랑캐뿐만 아니라 남쪽의 방비에도 힘쓸 것을 비밀리에 지시했다.

<“세견선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고 덕천가강의 생사도 확실히 알지 못해 왜국의 정세를 헤아릴 수 없는데, 방비는 엉망이 되어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그저 세월만 보내며 형식적인 일만 꾸미려 하고 있으니 내가 한밤중에도 근심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서북쪽의 방비도 형편없다. 만약 변고라도 생기면 무슨 병력으로 지킬 것인가. 참으로 한심하다. 하삼도의 도 순찰사를 즉시 내려보내 그들로 하여금 잘 계획하여 방비하도록 하라.”>

광해군 10년(1618) 7월 2일에는 나주 목사 임장에게 “군병을 조련하고 성지를 수리하고, 군량을 쌓아두고, 기계를 갖추는 일을 착실히 거행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임금은 기익헌을 경상우도로, 원수남을 충청도로, 박유현을 전라 우수영으로, 조양부를 경상 우병영으로, 이대남을 경상좌도로 보내 배 만드는 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같은 해 7월 7일에는 병선에 대한 전쟁 연습을 명령한다.

<“적(누르하치)이 비록 배를 잘 탈 줄 모르나 우리도 근래 해전을 연습하지 않았으니 훈련도감에서 병선을 정돈하여 전쟁 대비 훈련을 한 후 9월 내에 위에서 시험하고 검열하라.”>
이보다 하루 전인 7월 6일에는 비변사에서 병사들이 입을 갑옷을 준비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비변사에서 아뢰었다. “전쟁의 용구는 갑옷보다 절실한 것이 없는데, 무기고에 저장된 것이 그 수가 많지 않고, 서북 변방에 남겨놓은 것도 심히 적습니다. 군사를 조련하고 지키고 방어하는 시기에 허다한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습니다. 지난번 각 도 병영 수영 및 각 고을에 갑옷을 갖추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달 그믐 안에 전부 올려와 군용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처럼 광해군은 군사력을 기르고, 성을 수축하는 등 착실하게 전란에 대한 대비책을 세운 결과 광해군 14년(1622) 10월에는 병기도감에서 조총 900여 자루, 대포 90문, 기타 신무기를 대량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국방력 강화를 통해 광해군은 일본의 재침략, 후금의 군사행동에 대비하는 한편 명나라와의 외교 교섭에서 독자적인 행보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 이복 동생 영창대군의 최후

이러한 외치(外治) 문제 외에 내치(內治)에도 눈을 돌려 왕권 강화 프로그램에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광해군은 맺힌 감정이 풀리지 않았는지 즉위 직후인 즉위년 3월 15일 선조의 선위 교서를 자기 집에 숨겼던 유영경을 경흥에 위리안치시켰다가 그 해 9월 5일 자결을 강요하여 죽였다.


또 사사건건 왕권에 도전하는 발언을 일삼던 형 임해군을 유배시켰다가 죽이고,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마저 광해군 5년(1613) 서인으로 폐위시켜 강화도에 위리안치했다. 영창대군의 집 주위를 가시나무로 둘러놓고 지켰는데, 삼엄한 감시가 임해군 때보다 배나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광해군 6년(1614) 영창대군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뜸질해서 죽였다. 영창대군의 죽음 장면은 광해군 6년(1614) 1월 13일 실록에서 발견된다.

<정항을 강화 부사로 삼았다. 정항은 무인이다. 임해군이 귀양 가자 이정표가 살해했고, 영창대군이 귀양 가자 정항이 살해했다. 두 사람이 잇따라 죽자 사람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린 앙화라고 했다. 영창대군이 죽을 때의 나이가 9세였다.

정항이 강화 부사로 부임한 뒤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했다. 읍 안의 작은 관리로서 영창대군의 위리를 수직한 자가 있었는데 불쌍히 여겨 물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먹지 못해 기력이 다해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항은 그가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해 떨어지니 옆구리 뼈가 다 탔다”고 했다. 지금도 강화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광해군 5년에는 또 ‘칠서의 옥’(명문가의 일곱 서자들이 은을 모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끌어들여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반란사건) 사건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연루됐다 하여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다.

광해군 7년(1615)에는 신성군(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 소생)의 양자 능창군 추대 사건이 발생해 능창군과 신경희 등이 죽음을 당했다. 능창군은 후일 쿠데타로 집권한 능양군(인조)의 동생이며 신경희는 거의 4대장 중 한 사람인 신경진과 인척 관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능양군을 비롯한 서인 세력들은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광해군 10년(1618)에는 인목대비가 후궁의 위치로 강등되어 서궁(오늘의 덕수궁)에 유폐됐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50세의 선조에게 시집와서 영창대군을 생산할 때만 해도 그녀는 전성기였다. 그러나 25세 되던 해에 남편이 죽어 청상과부가 됐고, 친아들 영창대군마저 의붓아들인 광해군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친정 아버지 김제남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와중에 자신 마저 후궁 신분으로 격하돼 연금된 것이다.

광해군은 왕권에 조금이라도 도전하는 기미가 보이는 인물은 철저히 타도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 결국 친형과 이복 동생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행위는 유교적 질서에서 볼 때 폐륜행위라 하여 후일 쿠데타군에게 명분을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

◆ 명과 후금의 격돌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것은 광해군 8년(1616)의 일이다. 광해군 8년 2월 23일, 함경 감사와 북병사의 장계에 ‘종성에서 헤아릴 수 없는 누르하치의 정병이 나왔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시절부터 국경지역에서 누르하치군이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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