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전설 ⑭
석문면 난지도(蘭芝島) 유래
당진의 전설 ⑭
석문면 난지도(蘭芝島) 유래
  • 당진신문
  • 승인 2009.03.09 11:14
  • 호수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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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석문면 교로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9km정도 떨어진 해상에 난지도(蘭芝島)라는 당진군에서 제일 큰 섬이 있다. 무병 의병들의 무덤인 의병총이 있고 옛날 세곡미를 실어 나르던 조운로로 옛날에는 難知島라고 불렀었다.




석문면 교로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9km정도 떨어진 해상에 난지도(蘭芝島)라는 당진군에서 제일 큰 섬이 있다. 섬의 넓이는 약 5㎢이다.
인접지에는 대호방조제가 있고 실치잡이 어촌으로 유명한 서산군 대산면 삼길포구가 있다. 대난지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소난지도, 우모도, 소조도 등의 섬이 올망졸망 있다.


대난지도는 고운 백사장에 작열하는 태양아래 붉게 핀 해당화, 울창한 해송, 약초인 방풍(防風), 모래 사구(砂丘)가 기묘하게 어울린 반달모양의 해수욕장이 있고 우럭, 갯장어, 망둥이 등 바다낚시도 즐길 수 있는 천혜의 관광지이다.


하루 4회씩 서산군 삼길포구와 17톤급 나지호가 운행하고 여름 관광철엔 인천-난지-삼기포간 70톤급인 여객선이 하루 1회씩 3시간 걸려서 운행된다.


소난지도에는 홍일초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무병 의병들의 무덤인 의병총이 있고 옛날 전라도 등지에서 세금으로 낸 쌀과 같은 조곡미(組稅米)를 실어서 서울 경창(京倉)으로 가지고 갈 때 많은 선박들이 풍랑을 피해서 쉬어가거나 한강이 결빙하면 조운선이 상륙할 수 없어 얼음이 녹고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던 요로로 좋은 포구가 있다.


옛날에는 세금을 곡물로 받아서 하천이나 해안가에 창(倉)을 세워서 그 곳에 일시 보관했다가 쾌청한 날을 택해서 서울 경창(京倉)으로 운반했는데 이때 육로보다는 해운이나 하운로(河運路)를 더 많이 이용했다.
그런데 이 당시 태안반도의 안흥항 일대와 본국의 난지도 일대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파랑이 일고 바다가 험하여 자주 인명과 조세미를 수장시키곤 했다.


그래서 난지도를 옛날에는 難知島라고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당진현조에도 “난지도수가 당진현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는 34리 이며 당진포의 만호가 군병을 나누어 지킨다.” 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難知島라고 기록되어 있다(難知島戍-在縣 北海中周三十里唐津浦萬戶分兵成之).

 이 당시 남해 마산에서 시작하여 완도, 노화도, 장산도, 위도, 원산도, 안흥, 대난지 서쪽, 덕적도, 손돌목, 용산 강창을 거쳐 남서 조운로가 뻗어 있었다.


원래의 섬 이름인 難知島가 난초와 지초가 많은 蘭芝島로 바뀐 연유에는 아래와 같은 난지도 황룡과 청룡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① 황룡과 청룡

옛날 대산반도에 살던 하씨(河氏) 일가족이 가족을 데리고 신천지를 개발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동쪽을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서 난지섬의 모래사장에 표류하게 되었다.


큰 뜻을 품었던 하씨는 대 실망을 하면서 섬의 산정에 올라가 보니 넓은 땅과 기름진 들이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화전을 일구기 위해서 불을 놓았는데 산허리 부근에 와서는 불길이 이상하게도 끊기었으며 그쪽으로는 한치도 불길이 넘어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불을 질렀지만 여전히 광풍이 불면서 불길이 끊어졌다.
하씨는 할 수 없이
“내일 다시 마른나무를 많이 놓고 불을 질러야지.”
하고는 일찍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도사가 산허리 부근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 섬에 살려면 내말을 잘 들어라. 내일 한낮에 청룡과 황룡 싸움이 있는데 그들은 서해바다 바깥쪽에 사는 청룡이 서해바다 안쪽에 사는 황룡을 몰아내기 위해서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이다. 황룡은 싸움을 승낙했지만 늙고 기운이 없어서 청룡한테 싸움에 질것이다. 그러니 네가 사는 이 섬을 지키는 황룡이 싸움에 이기게 하기 위해서 여기 화살과 활을 놓고 가니 네가 화살을 쏘아 내일 청룡을 죽여라.”라고 말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씨가 잠에서 깨어나니 꿈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머리맡에 활과 화살이 정말로 놓여 있었다.
이튿날 하씨는 일찍 밥을 먹고 도사가 가르쳐 준대로 지정된 장소에 가서 바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한쪽에서 파도가 산더미처럼 치더니 청룡이 입을 딱 벌리고 나타났다. 황룡도 어느새 나타났는지 가까운 바닷물 속에서 나타나 서로 엎치락 뒷치락 하며 싸움을 시작했다.


한참동안 싸우니 황룡이 기진맥진하고 몸을 움직이는 동작이 둔해져서 곧 죽게 되자 하씨는 얼른 청룡을 향해서 힘껏 화살을 쏘았다.

그런데 공고롭게도 황룡이 물속에서 불끈 솟는 바람에 하씨의 화살에 황룡이 맞았다. 황룡은 하늘을 향해 한참동안 솟구치더니 무서운 신음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섬의 한쪽 끝을 치니 떨어져나가 그것이 오늘날의 소난지가 되었다 한다.


하씨는 청룡을 죽이기 위해 쏜 화살이 잘못하여 황룡을 죽게 하자 그만 어쩔 줄을 모르고 후회하면서 매일 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하루는 하씨가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비가 촉촉히 내렸다. 하씨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속죄하고 있었는데 황룡이 죽은 자리에 이상한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는데 그 풀을 뜯어보니 난초(蘭草)였다.
하씨는 그 후 항상 속죄하는 마음으로 착실하게 살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들이 장사를 치른 지 10여 일 동안 계속 비가 내렸다.


비가 개인 후 무덤근처에는 또 하나의 이상한 풀이 돋아났는데 뜯어보니 지초(芝草)였다.
그 후 양 첫 글자를 따서 이 섬을 「난지도(蘭芝島)」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도 대난지도에 용못이 있어 시퍼런 물이 철철 넘쳐 전에 군함이 정박하고 군인들이 내려 빨래를 하여 옷을 말려 입고 갔다 하며 얼마 전 제방을 400m 쌓으면서 마지막 둑 마무리공사를 하는 날 용충 둑이 터져 쑥곶이 생겼다.
또 지하수를 뚫으면서 자연스레 매꿔져 현재는 용충의 형체만 있고 물은 없다.


② 망재산 봉화와 청두락골

석문면 대난지도 망재산에서 청일전쟁 당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석문면 삼봉리로 봉화를 올려 전하였다. 망재는 이 산에서 망을 보았다고 해서 지어진 산명으로 망재 앞 풍도앞바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면천군으로 연락했다.


청두락골이라는 곳은 청나라 군사들이 진을 쳤다고 해서 지어진 지명으로 삼봉초등학교 난지분교장 자리에 중국의 사신인 참사가 살았고 그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는데 현재 이 비 반쪽이 석문중학교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③ 도둑애미

석문면 대난지도리 바닷가에 「도둑애미」라는 곳이 있다. 바다의 침식으로 굴이 패여서 아래가 쑥 들어가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위뿐 굴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아도 굴이 잘 보이지 않는데 도둑들이 은신하기에 참으로 좋은 곳이다.


옛날 삼남지방에서 추수하여 거둬들인 세곡을 싣고 올라오다 이곳 대난지도와 소난지도 사이 바다를 통과하였는데 이곳 도둑애미쯤에 오면 물이 정지했다.
물의 흐름이 절묘하여 물살이 빠르고 회돌이를 치어 그 곳을 지나려면 배가 잠시 멈칫거린다. 즉 썰물과 들물 때에 배가 딱 섰다가 물이 만조 되어 북서쪽으로 올라갈 때 배가 움직인다.


옛날에 돛단배로 닻을 주면 조류를 따라 흘러가는데 그곳에서 멈칫거렸던 것이다.
그럴 때 해적이 나타나 공갈을 치면서 물건을 노략하는데 일제치하 당시 여기서 이곳을 지나는 배들을 위협하여 노략질을 많이 하였다.


이는 의병, 동학군들이 싸우다 몰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고 서울 마포경창으로 운반되는 곡물들을 탈취하기 쉬운 소난지도로 이동해 주둔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된 논문은 '소난지도의총'(이인화, 2001, 국가보훈처)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④ 보오란 절

석문면 소난지도리 우모도에 「보오란」이란 절이 있었는데 산줄기 굴곡이 심한 곳으로 두 아름정도의 유투나무가 있었고 그 밑에 우물이 있었으며 지네가 많았다.


그 절에 스님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우모도에서 석문면 교로리로 축지법을 써서 버선발로 물을 건너 다녔다고 한다.
현재 절은 없고 1950년 6.25동란 전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