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준(朴哲濬) / (예) 공군대령

약 력
- 경남대 정치외교학 박사과정
- 합동참모본부 작전참모부 연합/합동작전담당
- 한미연합사 미사일방어처장
- 한미동맹기념관 추진위원



글싣는 순서
·제1부/ 발술희의 출생과 배경
·제2부/ 태조왕건의 의형제 박술희
·제3부/ 가장 홀대받는 영웅 박술희
·제4부/ 이 보다 더 부끄러울 수는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분통이 터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다.
역사의 눈길은 패자에게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없다.


아무리 승자라 하더라도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무대의 한 중앙에 서 있는 그 순간뿐이다. 그러나 고려를 개국한 영웅으로 한순간 역사의 조명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반역자의 칼에 쓰러진 박술희는 후세로부터 잊혀지게 되었다. 특히 반역자의 쿠데타가 일부라도 성공한 경우에는 반대파 일가족은 대부분 몰살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진의 면천박씨 시조인 박술희의 후손은 남한에는 5천명 내외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신라와 당나라의 공무역을 담당하였던 대진(大津)은 당진(唐津)이었다. 당진을 중심으로 가장 큰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였던 박술희(朴述熙) 장군에 대해 1.2.3.4부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1부에서는 박술희와 복지겸 그리고 당진에 대해서 알아보고, 2부에서는 고려를 개국한 태조왕건의 의형제인 박술희에 대해서 기술하고, 3부에서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도 후손들로부터 가장 홀대받고 있는 박술희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또한 제4부에서는 박술희 장군 기념관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박술희(朴述熙 : ? ~ 945)는 충남 당진군 면천면(당시 혜성)에서 출생하였으며, 당진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시조이다.

면천(沔川)은 충청남도 당진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때에는 혜군 또는 지비(智非)라 부르던 것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 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현종(顯宗)때 운주(運州 : 홍주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태종(太宗)때 와서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으나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에 속한 면천면(沔川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말 여초의 혼란시기

신라 下代 155년 동안에는 무려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은 지배계층의 분열과 대립으로 나타났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쟁탈전은 진골귀족 사이의 자기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진골귀족 내부의 분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원래 진골귀족들은 혈연적 유대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공동운명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이들의 유대를 이완시켜 족당(族黨)의 분립을 가져오게 하였다. 같은 김씨 왕족이지만 족당에 따라 서로 대립하고 왕위를 둘러싼 싸움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진골귀족들의 왕위싸움은 그들의 신분 조건보다 경제력과 사병의 무력에 의지하여 이들의 분열과 대립은 확대되어 갔다.
신라 하대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6두품과 지방 호족세력의 진골귀족에 대한 도전은 골품체제를 해체하고 신라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6두품 세력의 불만과 지방호족의 등장

이와 같은 혼란기에 6두품 계층은 사회현실에 불만을 품고 사회체제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였다.
비록 관등이 아찬까지 밖에 오를 수 없었으나, 국학(國學)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또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이 되어 유교지식을 쌓아 국가의 정책결정에 참여하거나 행정적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국왕의 근시적(近侍的)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 가운데 당에 유학하여 당의 개방된 사회체제를 경험한 일부는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체제를 개혁하려 했는가 하면 한편 새로이 등장하는 지방세력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표적인 예가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최언(崔彦)를 들 수 있다. 이들 6두품 세력 가운데 일부는 은둔생활로 여생을 마치던가 후백제 혹은 고려의 건국에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반신라적인 세력으로 전환해 갔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라체제를 부정하고 사회모순를 개혁하는데 주된 역할을 한 것은 각 지방에서 새로 성장한 호족(豪族)들이었다.


호족은 신라말에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여 지방사회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배권을 형성하고 있던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서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지배세력이었다.
호족은 그 출신에 따라서 대체로 낙향귀족(落鄕貴族) 출신의 호족, 군진세력(軍鎭勢力) 출신의 호족, 해상세력(海上勢力) 출신의 호족, 촌주(村主) 출신의 호족 등의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낙향귀족(落鄕貴族) 출신의 호족

落鄕貴族은 본래 중앙귀족이었으나 지방에 내려가 토착세력화 된 귀족을 지칭한다. 이러한 낙향귀족에는 첫째 국가의 사민(徙民)에 의한 낙향귀족과 둘째 진골귀족의 분지화(分枝化)와 자기도태 과정에서 몰락한 낙향귀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국가의 사민 조치에 의해 낙향한 귀족이건, 진골귀족의 자기도태 과정에서 몰락한 귀족이건 이들 낙향귀족은 신라 하대에 5소경과 9주의 치소를 중심으로 지방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이들은 지방에 거주하면서 토착적 기반을 마련하고 신라말의 혼란기에 이르러 호족으로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5소경과 9주의 치소는 신라말-고려초에는 대체로 유력한 호족들의 거점으로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청주(淸州 : 서원소경), 충주(忠州 : 중원소경)와 명주(溟洲)의 호족세력을 들 수 있다.


군진(軍鎭勢力) 출신의 호족

신라의 군진(軍鎭)은 처음에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내륙의 요지에 설치하였다.
삼척에 설치한 북진(北鎭 : 武烈王 5년, 658)은 말갈(靺鞨)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고 , 평산에 설치된 패강진(宣德王 3년, 782)은 북변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해적의 퇴치나 해상 방어를 위하여 해안의 요지에 군진이 설치되었다. 완도의 청해진(興德王 3년, 828), 남양의 당성진(흥덕왕 4년), 강화의 혈구진(文聖王 6년, 844)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패강진과 청해진이다.


특히 패강진 지역의 호족은 송악의 호족인 왕건 집안과 결합하여, 고려의 건국과 후 삼국 통일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고려 초기의 정치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청해진은 흥덕왕 3년에 장보고(張保皐)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장보고는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앙귀족과 연결하여 중앙정치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한편 북진이나 당성진·혈구진을 기반으로 한 군진세력은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궁예, 왕건과 연결하였던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 KBS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천추태후” 신정왕후(神靜王后)는 패강진 출신 호족으로 태조의 6왕후 23부인 가운데 3왕후 8부인을 배출한 黃州皇甫씨의 皇甫悌恭이 대표적이다.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세력

당군의 한반도 철수 후 신라의 해상무역은 활발해졌다. 각지의 물자유통이 원활해져 산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른 문화의 향상과 생활양태의 변화는 물자수요를 크게 증대시켰다.
그 결과 무역관계에서도 조공에 의한 공무역만으로는 수요증가를 따를 수 없어 사무역이 왕성해졌다.


해안지역의 지방세력은 사무역을 통해 번성했고, 이러한 해상교역은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신라 하대에는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장보고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군소 해상세력을 통제해 무역의 이익을 독점했으나, 그의 암살 이후 서남해안 지대의 해상세력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쌓아 갔다.


이러한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중 대표적인 존재는 송악지방의 왕건 가문이었다. 그의 선대에 관한 설화는 그의 가문이 고구려 계통이며 바다와 연계해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예성강 하구지역은 당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왕건 가문 외에도 해상세력 출신 호족이 있었다.
먼저 백주(白州, 지금의 황해도 연안)의 유상희(劉相晞)를 들 수 있다.


그는 예성강 하구지역에 위치한 4주(州) 3현(縣) 사람들을 동원, 작제건(作帝建, 왕건의 조부)을 위해 영안성(永安城)과 궁실을 지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다음으로 정주(貞州, 지금의 풍덕)의 유천궁(柳天弓)을 들 수 있다.


그는 왕건의 첫째 황후인 신혜황후 유씨의 아버지다. 당시 정주는 수군기지였는데, 왕건이 나주(羅州)를 정벌할 때 이곳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했다.
예성강 하구지역 외에도 나주, 영암, 압해, 혜성, 강주, 울산 등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근거지에는 해상세력이 부를 축적해 호족으로 등장했다.


나주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서남 해안지역의 대 중국 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나주 오씨는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나주의 다련군(多憐君)은 고려 태조의 둘째 황후인 장화황후(莊和王后) 오씨의 부친이다.


나주 오씨의 조상은 당의 상인으로 흥해 해외무역을 위해 신라로 건너와 정착했다고 한다.
영암은 나주와 함께 나말여초에 서남 해안지역의 대 중국 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풍수지리설을 발전시킨 도선(道詵)과 그의 제자 경보(慶甫)가 이 지역 출신이다.


영암최씨는 최지몽(崔知夢)을 배출시킨 가문이다. 최지몽은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천문에 정통하였으며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영암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다. 압해(壓海, 현 신안군)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해상교통 요지다. 이곳에는 능창(能昌)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수전에 능해 수달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부근에 있는 여러 섬의 군소 해상세력과 결속해 왕건의 수군에 대항했다.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서도 해상세력이 대두했다. 왕봉규(王逢規)는 경명왕(景明王) 8년(924)에 천주절도사로서 후당에 사신을 보냈다.
그 후 경애왕(景哀王) 4년(927) 3월에 왕봉규는 후당으로부터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직위를 제수받았다.
왕봉규는 천주(泉州, 현 의령)에서 세력을 형성해 마침내 강주지역을 지배하게 된 호족이었다.

그가 후당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정치적 의미가 크나 조공을 통한 공무역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울산은 경주의 외항으로 무역의 중심지였고, 당·일본과 통하는 국제항이었다.
이곳에서는 박윤웅(朴允雄)이 신학성 장군(神鶴城將軍)을 자칭한 호족이었다. 그는 울산항의 무역을 장악해 성장했으므로 해상세력 출신 호족이라 할 수 있다.


나주(羅州)의 다련군(多憐君)은 왕건의 둘째 황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의 아버지로서 나주지역 해상 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이밖에도 군·현(郡·縣)의 城을 근거지로 하여 성주(城主)라고 불리어지는 호족 가운데는 촌주 출신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혜성(면천)의 해상세력 박술희 가문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혜성(…城)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면천군(沔川郡)으로 불린 곳이다. 혜성에는 신라시대에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이 설치돼 있었고, 당의 사신과 상인이 머무르는 숙소가 있었다.


또한 신라의 조공물품을 실어 보내는 대진(大津)이라는 항구가 있었다. 혜성 출신의 호족으로는 박술희(朴述熙)와 복지겸(卜智謙)을 들 수 있다.
박술희는 나중에 고려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의 후원자로 왕건, 나주 오씨와 긴밀한 관계였다.


복지겸의 선조는 당에서 와서 혜성에 거주했는데,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했다.
박술희의 아버지인 득의(得宜)가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대승(大丞)의 벼슬을 하고 있었던 점은 박술희 가문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알수 있다.


고려초 1품은 삼중대광 ·중대광(重大匡), 2품은 대광(大匡) ·정광(正匡), 3품은 대승(大丞) ·좌승(佐丞), 4품은 대상(大相) ·원보(元甫), 5품은 정보(正甫), 6품은 원윤(元尹) ·좌윤(佐尹), 7품은 정조(正朝) ·정위(正位), 8품은 보윤(甫尹), 9품은 군윤(軍尹) ·중윤(中尹)이었다.


이 중 삼중대광·중대광은 공신이나 고위관직자에게, 2품 이하는 향직에 수여되었다.
대승(大丞)은 고려초 제도가 정비되기 전에 문·무관에게 수여되었으며, 9품중 3품에 해당하였다. 이 호칭은 존속, 비관인층(非官人層)과 지방 호족들에게 수여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초 강감찬(姜邯贊) 장군에게도 대승(大丞) 직위를 추증하였던 것을 보면 상당한 직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술희의 부친 박득의 역시 아들 박술희와 함께 고려초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득의와 술희 부자 모두 상당한 벼슬에 올랐으며, 혜성지방의 강력한 호족이었음을 알수 있다.


당진은 신라의 가장 큰 무역항

통일신라 이후 조선술의 발달 등으로 대외무역이 크게 번성하자 지방세력들은 자기의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았다.
원래 대외무역은 조공의 형식을 취하여 국가간에 행하여 왔었지만, 세력을 점차 증대시켜 온 지방의 사상인(私商人)들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민간무역을 하기에 이르렀다.


박술희는 혜성군( 城郡)의 호족출신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박술희가 면천(혜성군)의 호족출신 이었던 것은 박술희의 선대(先代)가 이미 이 지역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박술희 가문이 지방세력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술희 집안의 세력근거지인 면천(혜성군)은 신라 때부터 대중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현재 당진읍내 및 면천은 바다와 직접 접하고 있지 않으나, 그림과 같이 당시에는 바다와 긴밀히 접하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혜성군에는 수군창(水軍倉)ㆍ곡창(穀倉)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당나라의 사신과 상인의 숙소가 위치해 있었다.


혜성군에는 신라의 조공(朝貢)을 실어 보내는 대진(大津 : 현재의 唐津)이라는 항구가 있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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