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좋은 명소] 당진 남산공원- <상록수>를 다시 펼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지난 9일 오후 당진의 명소 남산공원을 산책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가끔 눈에 띄었다.

단풍나무를 구경하다 잠시 더 위로 올라서면 비로소 늘 푸른 상록수길이 이어지다가 어느새 우뚝 서있는 탑을 발견하게 된다.

이 상록탑은 저항시인 겸 영화인으로 농촌 계몽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심훈(1901~1936)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후 당진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이 가을에 당진 남산공원을 걸어보고 심훈의 심오한 뜻을 찾게 된다. 이곳에 와서 다시 한 번 책을 펼치면 마치 주인공이 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상록수>에서 수원고등농림학생 박동혁과 신학교 여학생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보사에서 주최한 보고회 겸 위로회 석상에서 만나 동지가 된다.

동혁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 한곡리로 가 농촌계몽운동을 한다. 영신은 기독교 청년회 농촌사업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청석골로 내려온다. 그녀는 부녀회를 조직하는 한편 마을 예배당을 빌려 어린이 강습소를 운영한다. 그녀는 기부금을 얻어 새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운다.

어느 날 주재소 소장은 영신에게 강습소가 좁고 낡았으니 학생을 80명으로 제한하고 기부금을 강요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청석골에 돌아온 영신은 학생들을 내보내나 아이들이 수업을 들으려고 애쓰는 모습에 감동하여 다시 받아준다. 영신은 하루바삐 새 교실을 만들어 아이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영신은 재력가의 집을 찾아가 기부금을 내줄 것을 간청하고 이로 인해 주재소 신세를 진다.

출소한 영신은 과로로 쓰러져 입원하고, 기천은 농우회원들을 매수해 진흥회로 명칭을 바꾸고 회장 직을 맡는다. 화가 난 동혁의 동생이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자 동혁이 동생 대신 수감된다. 영신은 동혁을 면회하며 계몽운동에 전념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영신은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는 동안 병이 악화되어 청석골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영신을 장사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동혁은 상록수를 바라보며 농민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다.

# <상록수> 어떻게 탄생했나

심훈의 <상록수>는 당진시 송악읍에 위치한 ‘필경사’에서 탄생했는데 심훈선생이 1934년에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이다.

‘필경’은 심순선생이 1930년 7월 작품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8228;밭을 일구듯 표한하고자 하는 심훈선생의 의지와 함께 자신의 집을 필경사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심훈선생은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필경사에서 1935년 농촌 계몽소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상록수를 집필했다.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현상 모집에 당선된 심훈의 대표작이다. 《동아일보》 1935년 8월 13일자에는 소설 공모의 취지와 선후평이 실려 있다. “첫째, 조선의 농ㆍ어ㆍ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태와 정조를 가미할 것, 둘째, 인물 중에 한 사람쯤은 조선 청년으로서의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셋째, 신문소설이니 만치 사건을 흥미 있게 전개시켜 도회인 농ㆍ어ㆍ산촌을 물론하고 열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농촌계몽운동은 1931년 동아일보사가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 운동을 시행함으로써 큰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1935년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과 규제 때문에 중단되고 만다. 「상록수」의 여주인공은 원산여고 출신의 최용신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한 축으로 삼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들의 모습과 당시 농촌의 실상을 그리고 있다. 심훈의 「상록수」는 1930년대 발표된 다른 작품들, 즉 이광수의 「흙」(1932), 김유정의 「봄봄」(1935), 이태준의 「농군」(1939), 박화성의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과 함께 농민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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