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전설 ⑫
순성면 옥녀봉
당진의 전설 ⑫
순성면 옥녀봉
  • 당진신문
  • 승인 2009.02.23 11:30
  • 호수 7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옥녀봉 전경
순성면 중방리 북창마을은 남원천 옆에 홍주북창(北倉)이 있던 곳으로 부두(埠頭)나 수부(水夫)의 가옥, 주막, 객주집 등이 있었다. 현재 창고터, 뱃터, 그리고 해상의 안전을 비는 성황사터, 그리고 장승 등이 남아 있다.



순성면 중방리 북창마을은 남원천 옆에 홍주북창(北倉)이 있던 곳이다.
창(倉)은 옛날에 세금이나 진상품을 받아들일 때 곡물과 같은 현물세를 일시 보관하던 창고 같은 것을 말한다.


이 창고에 보관된 현물세곡을 배를 이용해 한양으로 옮기는 제도를 조운(漕運)이라고 하는데 이런 창고를 특히 조창(漕倉)이라 했다.
조창은 16세기경에야 창고시설을 갖추는데 아산의 공진창(貢進倉)도 중종 때야 창고 설비를 갖춘다.
그 전에는 노적(露積)형태였다.


이런 「창」이 설치되었던 곳에는 창마을이 형성되는데 부두(埠頭)나 수부(水夫)의 가옥, 주막, 객주집 등이 있었다. 북창마을도 창고터, 뱃터, 그리고 해상의 안전을 비는 성황사터(성황사 안에 홍주북창성황지신위가 모셔져 있었음), 그리고 장승 등이 남아 있다.


정부에서는 대개 해운판관(海運判官)을 두어 각 조창의 세곡 수납과 반출을 감독하게 하는데 실제 수납 때는 서기, 사령, 흡창, 주자(廚子), 통인(通人) 등이 임시 배속되고, 평상시에는 홍주 목사의 관리하에 고직(庫直) 2인이 있어서 간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산만 연안은 안성천과 삽교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해운 및 수상교통이 편리하고 주위 내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미곡과 아산만에서 잡히는 각종 어류와 넓은 간석지에서 소금 생산이 많아 좋은 교역처를 이루고 또 당성창( 城倉), 범근내포(泛斤乃浦) 조창, 공세곶창 등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큰 조창지가 있었다.


순성면 중방리에 전해오는 전설 두편이 있는데 옥녀봉은 신평면 상오리와 순성면 중방리 경계지점에 있고, 소금고개는 중방리에서 우강면 송산리를 넘는 고개로 옛날부터 이 고개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① 옥녀봉

옛날 이 마을에 옥녀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옥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집 뒷산에 자주 올라가서 놀았다.
어느 날 서울에서 사는 남자들이 이 마을에 왔다. 그들은 옥녀를 보고 탐을 냈다. 그들은 옥녀를 꼬드겨 서울로 끌고 가기로 했다. 옥녀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빚도 많았다.


옥녀의 아버지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옥녀를 팔기로 했다. 옥녀는 문밖에서 이 소리를 듣고 너무 슬퍼 산에 올라가 목을 매고 죽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사람들은 그 산을 「옥녀산」, 「옥녀봉」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곳이 공동묘지로 변해 있다.

▲ 소금고개 전경
② 소금고개

순성면 중방리에서 우강면 송산리 거북재로 가다보면 500m 지점에 소금고개라는 곳이 있다. 고개 남쪽은 건방죽이라는 지역으로 그 가운데 샘이 있고 그 건방죽을 넘어 가면 묘가 나온다.


옛날에 그 묘 뒤에 한 선비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와서 목탁을 치며 탁발(시주)을 하였다. 집주인이 나와 말하길
“스님께 들일 돈도 물건도 없으니 그냥 가시지요.”
하였다.

그러니까 스님이
“그래도 하루 저녁만 자고 갑시다.”
하더란다.

그래 선비 체면에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렇게 하시지요.”
했다. 저녁이 되어 스님이 바랑을 벗어놓고 잠을 청하는데 밥상이 들어오더란다. 밥상을 보니 하얀 쌀밥 밥상이었다.

그래 스님이 말하길
“아까 부처님께 드릴 보리쌀도 없다고 하더니 이런 쌀밥을 어떻게 났소.”

선비가 이르기를
“여름에 친기(아버지 제사)가 있어 뫼밥을 지어 올리려고 꿰달아 놓았던 것인데, 아버님께는 내년에 해드려도 되고 스님은 내 평생 우리 집에 든 처음 손님이니 대접을 하여야겠기에 이렇게 밥을 지었습니다.”
스님은 그 말에 감동하였다.


하룻밤을 잘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니 또 흰쌀밥 밥상이 들어오더란다. 그래
“어떤 쌀이 또 있었소?"
하니


“스님 같은 분이 다음에 또 오겠습니까?”
하면서


“이 쌀 뫼밥은 두 그릇인데 뫼밥 두 그릇을 모두 올리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을 잘 대접받고 보니 감동되어 스님이


“제가 배운 것이 하나밖에 없으니 묫자리 하나 잡아 주겠소.”
“아!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니 지금 최씨네 묘가 있는 곳을 잡으라 하더란다.


“당신 당세에 만석을 하는 것이 좋소? 아니면 아들 대에 정승을 하는 게 좋소?”
“아들 손자 때 따질 것 없이 내 대에 먹고 살게 해주십시오.”
하여 묘 자리를 잡아 주고 묘를 쓰는 방법을


“아무 날 아무 시에 묘 자리 좌향을 잡아 쓰시오. 그리고 10년 뒤에 당신 집에 들릴 터이니 공양미 100석을 시주하시오.”
이렇게 가면서 쌀 100석 공양하길 재차 당부하고 떠났다.


그런 후 어찌어찌 하니 논도 장만하고 돈도 벌어 잘 되었다. 10년이 되는 그 날 스님의 목탁 소리가 났다.
“그래 쌀 말이나 갖다 드려라.”
하니


"중이 시주는 그만 두고 영감님 좀 뵙자고 하며 10년 전에 묫자리 잡아준 중이 왔으니 만나자고 합니다.”
선비가 생각하니 쌀 100석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서 선비는 그런 사실이 없다며 딱 잡아뗐다. 중이 가만히 나오다 생각하니 너무 괘심해 오던 길을 돌아가서


"소승은 당신을 살려주기 위해서 왔소. 그러니 내 말대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 살림 또 망하오."
하였다. 그 주인 선비는 귀가 솔깃하여 그 처방을 물었다.


“그러면 쌀 100석 값을 갖다 놓아라.”
그 돈을 가져오자 중이 바랑에 그 돈을 넣고서
“그러면 방법을 알려주마. 건방죽 안에 샘이 있는데 그 안에 이무기가 있어. 그 이무기가 당신 조상과 재물을 뺏어먹으려고 하니 죽여라.”


“어떻게 죽입니까?”
“강문리 사발포에 가면 소금배가 아무 날 들어올 터이니 소금 100석을 갖다 그 샘에 풀어라. 그러면 이무기가 죽을 것이다.”


라고 말을 하고 갔다. 그 말을 들은 선비는 품꾼 100명을 사가지고 소금배에서 나오는 소금을 사왔다. 그리고 소금고개 밑에다 모두 풀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보니 그 건방죽에 커다란 거북이 한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선비는 쫄딱 망해 그 곳에서 떠나고 말았다. 현재도 순성면 중방리에 그 묘가 남아 있다.
사람은 약속을 지켜야 하고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