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승전목 할아배 바위
이배산(利背山)은 당진읍 사기소리, 구룡리와 면천면 사기소리와 경계를 이루는 높이 243m의 산이다.
승전목 용주봉 절벽 아래 승전암이 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우리나라 유일의 승전지이고 당진읍의 옛 면명인 이배면이었다.
기우제, 산신제, 서낭, 장승 등과 천주교 공소가 3곳, 절터가 8개가 있던 역사문화유산의 보고이니 사적지로 지정하여야 할 것이다.






이배산(利背山)은 당진읍 사기소리, 구룡리와 면천면 사기소리와 경계를 이루는 높이 243m의 산으로 승전목(승전한 골짜기)쪽으로 용주봉(龍珠峰)이 있어 조상들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왔던 산이다. 용주봉은 산세가 굵고 수려하며 물굽이가 골곡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 승전목에 이르러 그 모습이 절정에 이른다.

그동안 삼호개발이 이배산과 용주봉을 훼손했고 현재는 (주)전원주택 사업자가 목쟁이를 모두 잘라내 너무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용주봉 아래쪽은 천안전씨, 달서서씨 등의 묘소와 함께 공동묘지가 늘어 서있다. 용주봉은 기암절벽으로 산등성이가 터져 마치 이무기의 등처럼 생겼다. 한재(旱災)가 있을 시 당진읍장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용이 물을 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 석산개발로 훼손된 이배산과 용주봉 전경
1914년 군면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이배산명을 따서 이배면(利背面)이 되었다.(이 면명은 1928년 군청소재지명으로 변경될 때까지 이 산명을 썼다.)


이 지역은 과거 면천군의 관문으로 옛날부터 한자로는 승전곡(勝戰谷)이라고 기록하고 「승전목」이라고 불렀다. 내포의 심장 가야산 지맥이 흘러 과거부터 절, 천주교 공소, 민간신앙물들이 많이 산재해 있으며 면천팔경 중의 하나인 「승전어화(勝戰漁火)」지이다. 절터는 이배산을 중심으로 용주봉 아래 승전암(勝戰庵)과 성당사(聖堂寺), 그리고 당진읍 사기소리 고개인 쑥고개 아래 이름 모를 절터가 있었고 보회사, 보령사, 미륵암터 등이 면천쪽으로 있으며 서산쪽으로 사근사(沙斤寺, 마을명은 사근절) 등이 있었다.


▲ 용주봉에서 본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 전경
원래 구룡리는 마을지형이 구렁이같이 생겼다고 해서 「구렁」이, 「구룡」으로 변하여 구룡동이라 하였고 사기소리는 면천군 송암면(松岩面)지역으로 사기소(沙器所)가 있어 사기소리가 되었으며 미락골(다불산 기슭 미륵암터가 있던 곳), 새터말, 그리고 옹기점이 있어 점말 등이 있다.

여기에 천주교 교우촌들이 1866년 대 박해 이후 형성되어 인근의 송학리 황새울 공소, 사기소 공소, 구룡리 공소, 사근절 공소 등이 형성되었다. 그 흔적으로 승전목 안쪽 마을인 성당촌(聖堂村)에 구룡리 공소가 있고 면천면 사기소리 새터말에 사기소 공소가 남아 있다. 이 공소는 필히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 용주봉에서 본 당진읍 구룡리 승전목 전경
승전목에는 민백준청덕휼민마애비, 장승, 서낭당, 도깨비 바위, 할애비 바위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민백준청덕휼민비가 훼손되고 있으며, 장승, 서낭당, 도깨비 바위는 모두 사라졌다. 장승은 1930년까지 현 할애비 바위 앞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명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의 현장이 도로건설, 석산개발, 전원주택 등으로 개발한다고 훼손되고 있으니 너무도 안타깝다. 이 역사문화의 현장을 훼손한 허가 당국은 분명 역사에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나 우선 이 지역을 사적지로 지정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게 보호할 것을 제안한다.

▲ 용주봉 절벽아래의 승전암 절터
① 승전목 할아버지
승전목은 임진왜란 때 구산으로 왜적들이 지나가게 되었다. 그것을 안 고장 사람들이 그 산이 바위산으로 돌멩이가 많다는 걸 생각하여 산꼭대기에서 돌멩이를 아래로 던져 왜적들을 모두 물리치게 되었고 그때부터 승전목이라 하였다.


승전목 절벽에 할아버지를 그려놓았었다. 그 바위 옆에 안바위와 바깥바위가 있다. 물 건너 도깨비 바위가 있는 쪽에서 돌을 던져 안으로 쏙 들어간 안바위를 맞추면 딸을 낳고, 밖으로 나온 바깥바위를 맞추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 승전암 기와장 조각들
② 승전암 쌀바위
이배산 옆의 용주봉 아래는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승전암이 있었다. 절터는 한 30평 정도 되는데 기왓장과 주춧돌들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알 수가 있다. 승전목에서 보면 현재도 이 암자터 아래 대나무들이 자라 알아 볼 수 있다.


이 조그만 암자의 바위 뒤에서 쌀이 한 톨 두 톨씩 떨어졌다. 그 떨어지는 양이 하루 한 사 홉 정도 되었는데 이 쌀로 나이든 스님과 어린 상좌(上佐)스님이 밥을 해서 겨우 겨우 먹고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이든 스님이 잠깐 절에 다니러 가게 되었다.


▲ 승전목 폭포-여름철에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다
상좌스님이 떨어지는 쌀을 바라보다가 생각하기를 ‘구멍을 더 크게 뚫어 놓으면 쌀이 한 두어 되쯤 더 쏟아지겠지. 그러면 지금보다 더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을 거야.’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긴 꼬챙이로 쌀 나오는 구멍을 뚫었는데 그때부터 쌀이 한톨도 나오지 않았고 절은 사리지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면천면 사기소리 쪽에서 당진읍 구룡리 쪽으로 승전목을 막 지나면 좌측 언덕에 절터가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흔적이 남아 있다.

③ 우리나라 유일의 동학군 대승전적지
1894년 11월 21일 한명순, 이화삼, 박용태, 김현구 등이 이끄는 내포지역 동학군 2만이 10시경부터 15시 30분경까지 사격과 화전으로 아까마쯔(赤松國封)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89명을 공격해 일본군 78명분 배낭, 상하 겨울내의, 밥통, 구두, 쌀자루와 휴대 식량 312식분, 탄약 612발 등을 손실시켰다.

이 전투는 동학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로 이후 면천읍을 점령하고 22일 예산군 고덕면 구만포까지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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