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낭송가협회 당진지회 김 명 회 회장

한 소녀는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꿈을 가지고 또 그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그 소녀가 자라서 2001년 주부 시낭송 대회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시낭송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스스로 자긍심을 깨워 일으켰다.
그것은 평범했던 주부가 현재의 훌륭한 예술가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였다.


바로 김명회(44) 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 회장은 <음악이 열리는 나무> <공상일기> 등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대표적 시인 황금찬의 문하에서 시문학을 공부했고, 현재에도 문인화를 배우는 등 끊임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2007년 시 등단을 하고 동인지를 통해 두 차례 작품을 발표했으며 지금껏 지은 시만 해도 100여 편이 넘는다.
지난해 한국문학진흥재단 주최 「한일 시의 축제」 에도 참여하는 등 시에 대한 남다른 열의로써 한국문인협회, 백양문학회, 당진문인화연구회 등에 소속되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손하경 기자 sarang418@hanmail.net


 

행복한 대가

2006년 12월 설립된 한국시낭송가협회 당진지회는 처음 7명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20여 명의 아름다운 식구로 늘어났다.
매월 첫째주 수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김 회장을 비롯한 시낭송가들의 아름다운 선율이 문화원 가득 울려 퍼진다.


“두 분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평범한 주부이고 프로는 아닐지라도 오로지 시가 좋아서 모인분들입니다. 사실 주부들이 마이크를 잡고 발표할 기회는 거의 없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되고 있어요.
처음엔 무척 쑥스러워들 하시지만 점차 당당함과 자신감을 찾는 모습에서 참으로 기쁘고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시낭송을 하게 되면 가슴에 와 닿는 순수하고 뭉클한 느낌이 참 좋습니다. 또한 자기 정화와 이웃을 돌아보는 따뜻한 마음씨를 갖게 되는 등 평화로움을 느끼게 되지요.
저의 작은 바람은 1년에 한 번 정도는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무대공간을 마련하여 일반인과 함께 어울려 시낭송을 하는 것입니다.


회원 중에는 오카리나 연주를 하는 분이 계셔서 시와 함께 어우러진 아주 멋진 무대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준비할 계획입니다”
김 회장은 아름다운 음성을 가진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여러 기관의 행사 때마다 결코 빠질 수 없는 ‘감초’와도 같은 그녀를 사람들이 가만 놔둘리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는 삶 자체로 보여졌다.
종가집 맏며느리로서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해가며 두 아들을 키우는 등 가정에서의 여러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사회에서는 어엿한 한국시낭송가협회 당진지회 회장으로서의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방학기간에는 아이들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주1회 시의 이론과 암송하는 시간을 갖고 있어요. 이를 통해 아이들의 발표력을 향상시키고 자신감을 주게 됩니다. 또한 상상력을 키워갈 수가 있어 부모님들께서도 상당히 좋아하세요.


살림밖에 몰랐던 제가 ‘멋지다, 잘한다’는 말에 매료되어 그것에서 큰 보람과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저의 목소리를 좋아하고 행사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무척이나 기쁘고, 이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 김명회 회장(좌 네번째)과 회원들.



훌륭한 예술가로 탄생하는 길

김 회장은 시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적극적이다. ‘시낭송지도자, 논술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주3, 4회 이상을 당진과 서울을 열심히 오갔을 정도다. 그녀가 지금의 위치에서 인정받는 시인이 되기까지는 그러한 값진 노력이 쏟아부어진 결과임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황금찬 선생님께 시문학을 배웠습니다. 그러한 명인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스스로도 자랑스러웠고,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 더욱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또 한국시낭송가협회 김문중 회장님께 시낭송을, 당진문인화연구회 김윤숙 선생님께는 문인화를 배웠지요.

감사할 분이 너무 많지만 그 중에 몇 분만 꼽으라 한다면 그분들입니다. 그 마음 평생 잊지 않고 반드시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김 회장은 여행과 등산을 좋아하여 그것에서 풍부한 시상을 건져낸다고 한다. 학창 시절 남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던 김 회장은 선생님의 칭찬을 독차지 했다.


“어릴 때부터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어요. 운동도 좋아했고… 학예회는 꼭 빠지지 않을 정도였고, 졸업식에서 송사와 답사는 모두 저의 차지였지요(웃음).


초등학교 3학년 때 웅변을 했는데 선생님의 아낌없는 칭찬이 있었어요. 아마도 그때부터 더욱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특히 시를 좋아해서 암송하면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그녀의 명랑함과 밝은 모습 뒤로는 어려운 가정형편의 배경이 숨겨져 있었다. 4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김 회장은 한 집안의 살림 밑천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공부를 잘하여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신문방송학과에 꼭 진학하고 싶었다는 꿈 많은 한 소녀였던 김 회장.


“스무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저의 꿈도 중요하지만 친정엄마에게 짐이 되면서까지 펼치고 싶진 않았지요. 고교졸업을 하고 중학교 행정실에서 8년간 근무을 했어요. 그 와중에 방송통신대에 다녔지요. 비록 졸업을 하진 못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남편을 만났으니까요. 의용소방대와 봉사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도 시를 좋아해서 가끔씩 저와 함께 시낭송을 하고 있어요.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갖는다는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입니다”
끝으로 그녀는 한국시낭송협회 당진지부 회장으로서 아쉬운 점과 바람을 말했다.


“현재 시낭송대회가 자주 있지는 않습니다. 도 단위의 시낭송대회를 자주 열어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훌륭한 예술가로서의 길을 열어주어야 해요. 조그만 단체에서 대회를 마련하기란 역부족입니다. 앞으로 시낭송대회가 자주 열려 훌륭한 예술가가 많이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김명회 회장이 시낭송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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