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용 삼 / 월간조선 편집국장


▲ 김 용 삼
비변사는 강홍립의 항복에 불만이 대단했다.
광해군 11년 4월 8일, 비변사는 “적에게 항복하는 것은 천하에 가장 나쁜 행실”이라며 항복한 자들의 처자를 감금하여 법으로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광해군의 답변.

〈“비변사의 뜻은 좋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 병력으로 추호라도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지난해 명나라가 우리에게 군사를 보내라는 격문이 왔을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고 군병이 교련되지 않아 전쟁에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오늘날 비록 패했다 해도 지난해의 계략과 부합되었으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냐.”〉

임금은 “사려 깊고 경험 많은 인재는 다 내쫓고, 젊고 일에 서툰 사람이 비변사에 많이 들어갔으니 국가 운영이 잘못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 없다”고 신하들을 비판한다.
이어 실록은 강홍립과 요동 파견군이 만주로 갈 당시의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나라지키기의 교훈을 남기고 있다.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임금이 명나라 조정의 정병 독촉을 물리치기 어려워 억지로 출사시킨 것이다.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오랑캐를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지시하여 오랑캐 장수와 몰래 통하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심하 전투 때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춰 투항한 것이다.〉

고상한 말은 국사(國事)에 보탬 안 된다.

수차에 걸친 임금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와 사간원은 4월 8일, 강홍립과 김경서를 처벌해야 한다는 보고를 또다시 올렸다. 이에 대한 광해군의 답변.

〈“고상한 말은 국사(國事)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강홍립 등의 죄를 논할 날이 어찌 없겠느냐. 젊은이들의 부박한 논변은 잠시 멈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광해군 11년 4월 8일, 임금은 중국 사신 상차관을 접견했다. 이날 광해군은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 사신을 데리고 노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임금:“천조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게 됐는데, 불행히도 오랑캐들이 창궐했습니다. 저희 나라가 온 힘을 기울여 적을 토벌했으나 정예병과 무기가 섬멸되어 이제는 스스로를 보존하기도 힘듭니다.”
상차관:“제가 중국에서 나올 때 두 총병이 패했다는 것만 들었을 뿐 귀국 군병이 전몰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임금:“저희 나라 인심이 견고하지 못해 임진년에 왜적이 왔을 때도 싸우기 전에 붕괴됐는데, 이번 강홍립 등이 한 짓은 못내 가슴이 아픕니다. 적을 격파하여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을 덜어드리지 못했는데 이처럼 망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희 나라 군신은 밤낮으로 부끄럽고 마음이 아파 거친 음식을 먹고 음악을 거두었지만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상차관:“나올 때 보니 고을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통곡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는데, 이로써 귀국의 죽은 병졸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임금:“적이 만약 저희 나라를 침범하면 병력을 보내 구원하소서.”〉

광해군 11년 4월 2일 오랑캐 사신이 국경에서 화친을 요구하는 누르하치의 서신을 전하고 갔다. 이에 답할 외교문서를 준비하던 비변사는 의논이 분분했다. “명나라에 품의하지 않고 대국의 원수와 화친을 맺는다는 것은 신하로서 할 일이 아니다”라며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

광해군 11년 4월 11일 비변사가 화친을 요구한 누르하치에게 보낼 답신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을 때 광해군은 이렇게 말한다.

〈“짐승 같은 것들을 의리로 책망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믿을 만한 형세가 있다면 누르하치 서신을 불태우고 거절하거나 의리로 타이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털끝만큼도 믿을 만한 구석이 없는데 한갓 고상한 말로 천조(중국)를 꾸짖는 그들을 꺾으려 한다면 반드시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옛날 임진년에 왜인이 서신에 답할 때도 오늘과 같았기 때문에 다음해에 큰 병난을 초래했다. 전철이 멀지 않은데 경들은 한갓 대의를 내세워 흉악한 오랑캐의 노여움을 촉발하려 하니 너무나 생각이 짧다. 지금 수천 명의 정병이 오랑캐에게 붙잡혔는데 경들은 측은한 마음도 없이 그들을 오랑캐 병사가 되게 하고 싶은가. 경들은 어째서 이런 것을 생각지 못하는가.”〉

해를 넘겨 광해군 12년(1620) 초에 누르하치와 외교교섭이 원만히 해결되어 볼모로 잡혀 있던 강홍립의 귀국을 알리는 통보가 왔다.
그러나 비변사는 광해군 12년 3월 28일 “강홍립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라며 입국시켜서는 안 된다는 보고를 올렸다. 임금은 강홍립을 끝까지 두둔했다.

〈“강홍립 등이 무슨 나라를 판 일이 있는가. 말이 너무 지나치다. 강홍립 등이 설혹 나온다 해도 그때 가서 죄를 논해도 늦지 않은데 어찌 차꼬에 채워 올려보내야 하는가. 즉시 서울로 올려보내라.”〉

임금의 지시에 대해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가했다.

〈사신은 논한다. 강홍립 등이 군사를 멋대로 이끌고 누르하치에 투항하여 나라를 팔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면 임금을 잊고 나라를 버린 죄는 피하기 어렵다. 마땅히 형벌을 시행하여 그의 머리를 중국에 전해야 한다.〉

사관들 마저 임금의 현실적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있으니 이 시절 광해군은 얼마나 외로운 상황에서 국가 운영을 해나가야 했을까.
결국 임금의 현실노선과 대신들의 명분노선이 갈등을 빚으면서 인조의 쿠데타 모의가 무르익게 된 것이다.

이 시절 조선 국왕이 오랑캐에게 은밀히 사신을 보내 양국(兩國) 형세를 관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에서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중국 황제는 광해군 12년 8월 13일 칙서를 보내 엄하게 항의한다.

〈“우리 군대가 잠시 패하자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싸우는 것을 관망하다 둘다 잡아서 이익을 보려 하는가.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내 왕래한 흔적에 대해 의심을 풀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나 또한 어떻게 참겠는가. 서로 도와서 하루아침에 정벌하여 수치를 씻고 흉적을 제거하면 공훈이 천고에 드날릴 것이다.”〉

이 대목에 사신은 다음과 같은 평을 달아놓았다.

〈이때 강홍립과 김경서 두 장수가 밀지의 내용대로 항복하여 오랑캐에게 사신 가는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중국 조정이 날로 심하게 의심하고 요동의 여러 진들이 모두 의심했다. 때문에 왕이 사신을 보내 아뢰자 이런 칙서가 온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도 조선에 대해 마냥 큰소리만 칠 수 없는 형편이 됐다.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계속 밀렸기 때문. 중국 황제는 은 2만 냥과 함께 조선군 파병요청을 또다시 해 왔다.

〈“그대 나라는 문치(文治)는 넉넉하나 무공은 굳세지 못해 짐이 누차에 걸쳐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대(광해군)는 군대 양성에 노력하여 실수가 없도록 하라. 강가의 요지에 군대를 매복하고 국경지대는 염탐을 철저히 하라. 오랑캐가 움직이면 선봉을 무찌르기도 하고 후미를 교란하여 전진을 못하게 할 것이며, 오랑캐가 후퇴하면 태만한 틈을 노려 요격하여 노루처럼 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하라.”〉

중국에서 추가 파병 요구가 계속 이어지자 광해군 13년 6월 1일 임금은 중국과 후금 사이에서 현명히 처신할 것을 당부하는 지시를 내렸다.

〈“적의 형세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데, 우리 병력과 인심은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고상한 말과 큰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이들을 담론으로 막아낼 수 있는가. 붓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종묘 사직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다.”〉

큰소리 때문에 나라 망칠 것…

마침내 명나라가 요동에서 누르하치에게 패했다. 임금은 광해군 13년 6월 6일 대신들을 불러 훈시를 했는데, 그 내용 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큰소리 때문에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의 형세가 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고려시대처럼 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정 신하들은 모두 나가서 결전을 벌이자는 의견인데, 그렇다면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하는가.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큰소리 때문에 나라 일을 망칠 것이다.”〉

당시 서북 변경 지역에서는 누르하치 군사들이 국경을 넘어와 약탈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임금은 광해군 13년 6월 17일 누르하치 군사들의 약탈에 대해 강경한 항의문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우리나라가 지키는 지역을 너희 군사가 짓밟고 소와 말을 약탈해 갔으니 신의가 어디에 있는가. 변경을 지키는 장수와 관리들이 싸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썽이 생길까 걱정하기 때문에 다시 물어서 처리하려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짓을 하지 말도록 너희 장수에게 말하라.’ 이렇게 항의문을 지어 보내라.”〉

광해군은 재임 15년(1623) 3월 12일, 군사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나고 인조 정권이 출범했다.

인조반정은 유교의 큰 덕목인 효(孝)와 사대주의를 손상시킨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正)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인조 쿠데타는 당시의 지배이념이었던 유교적 명분에 타당한 것이다.

역사에 대한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는 광해군과 인조 시대를 다시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조 정권에 의해 지나치게 격하된 광해군의 치적을 재평가하여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현실로 바라보는 인식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런 자세가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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