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된 시대 표현, 자연 통한 한국적 요소 탐구, 다시 인간 조망
대표작… 문맹자 시리즈와 소나무 시리즈

김경인 화가의 작업실은 순성면 성북리 아미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얀색 작업실에 들어서니 널찍한 곳곳에 그림들, 미술도구들이 있었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난로가 타오르고 있었다.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김경인 화가는 정정해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굴곡의 세월을 작가의 감수성으로 바라보며, 치열하게 살아온 고뇌의 흔적이 엿보였다.
유명환 기자 seagull197@naver.com




작가 이해, 주요 작품 및 설명

김경인 화가를 이해하려면 그가 살아온 시대를 알아야 한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6.25를 유년 시절에 겪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4.19, 이듬해 5.16을 겪었고, 이 후 30여년 계속된 군사정권을 경험했지요. 90년대에 들어서야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니까”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자유가 억압됐던 어두운 시대를 살며 고민했던 김경인 화가는 이를 그의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1972년 유신이 시작됐고, 1973년에 효성여대 교수로 재직했었는데 추상화를 하다가 민초들의 삶을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서양 그림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문맹자 시리즈’를 18년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우리 근현대사를 다룬 미술이 없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이어 6.25, 4.19, 5.16 등 엄청난 고통의 시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은 모두 예쁜 그림만 그렸지요. 어떻게 그림이 다 그럴 수 있습니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기 마련인데, 시대의 어둠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됩니까? 문맹자 시리즈를 1973년부터 그려, 1974년에 <문맹자 시리즈34-1>을 발표했지요.

▲ 문맹자 시리즈 34-1
그림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감옥같이 닫혀진 회색공간에 눈은 가려진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군상들을 신문지를 오려 콜라주한 것입니다. 일부는 훈장을 달고 있지요. 한때 압수당했던 그림이기도 하지만, 압제시대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지요. 당시는 군사정권의 긴급조치로 인해 사람들은 보아서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되며, 말해서는 더욱 안 되는 시대였지요.


이 그림에서 표현한 문맹자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닌 군사정권에 바른 소리를 못하는 지식인입니다. 이 그림으로 인해 정보부에 끌려갈 뻔 했는데, 청와대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잡혀가지는 않았지요. 신군부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진 군사정권의 억압을 표현한 그림으로는 <문맹의 세월>, <J씨의 토요일>, <소멸4>, <여의주>가 있습니다”


김경인 화가는 문맹자 시리즈에 이어서 그린 소나무 시리즈에 대해 설명했다.
“90년대 들어 민주화가 되니까 다른 소재를 찾고 싶었습니다. 우리 고유의 것을 그리고 싶었지요. ‘기와집을 그려볼까? 한복 입은 것을 그려볼까?’ 생각했었는데 그런 것은 고유의 것이지만 조선시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우리의 것을 그리고 싶었지요.

그래서 찾아낸 게 소나무입니다. 소나무는 한국 미술의 원류이며, 조형질서의 바탕이고, 한국인의 심성, 정체성, 흥취, 음악성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 때 나이도 50대에 접어드니 자연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 소낭구 이야기0301

당시 동양화로는 소나무를 그렸지만, 유화로 그린 것은 없었지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시도를 했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는 많이 다릅니다. 동양화는 평면적인 반면 서양화는 입체적이지요. 사고 자체가 그렇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보면 햄릿의 독백 속에 다양한 고뇌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춘향전을 보십시오. 춘향이의 이몽룡을 향한 일편단심만 있지 변사또에게 기울어질까 고민하는 것은 없습니다. 흥부전의 흥부만 해도 착하기만 하지, 애만 많이 낳고 무능합니다.

그림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동양화를 그리려면 ‘계자원’이라는 책을 보고, 매화, 난초, 소나무 등 각 소재를 그리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나 서양화는 실제 사물에 광선이 비취는 것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저는 소나무만 18년 그렸습니다.

제가 소나무 그림에서 그리려는 것은 소나무가 아닌 소나무가 가진 기운, 조형적 특징입니다. 소나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숲과 문화 연구회’에 참여하여, 공부도 했습니다. 그 때 각 소나무마다 다른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안강송에는 리듬성이, 금강송에는 직선미가 있습니다. 소나무 그림을 모아 지난 2004년 학고제에서 전시회를 열었지요”

근황, 앞으로의 계획

“1970~1980년대 작품 개인전시회를 하려고 계획했는데, 추진이 잘 안됩니다. 140여 편을 전시하려면, 벽면이 400~500m 필요하여, 웬만한 곳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국립미술관에서 하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대신 서울시립미술관, 조선일보미술관 등에서 열리는 초대작가전에 한두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그는 앞으로의 그림에 대해 말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있으니, 앞으로는 인간을 주제로 그릴 생각입니다. 예술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요. 사람의 인생을 볼 때는 전체로 봐야 하는데, 모두들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에 빠져, 탐욕도 부리고, 사랑도 하면서 너무 얽매여 살고 있지요.

하늘에 떠있는 비행기 위에서 보면, 사람들이 참 꿈틀대며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큰 구도에서 현실 극복을 지향하고, 이를 작품에 표현할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이 꿈틀대며 사는 세상에서 평온을 유지하는 비결은 동양의 중용사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컵에 물이 반 남았을 때, 어떤 사람은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반이나 남았네’라고 생각합니다. 얻어도 잃는 것이 있고, 잃어도 얻는 것이 있지요. 추상적이지만 인생에 있어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작업실을 나오며…

치열하고 용기 있는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김경인 화가도,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문맹자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시대의 인간상에 대해 고민했던 그가 이제 다시 인간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험난한 세월을 살았던 그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2000년대 후반에는 어떻게 표현될지 기대해 본다.


약/력/
- 1941년 인천 출생
- 197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 (회화전공)
- 1971년 창작미술협회 회원 출품을 시작으로 다수 전시회 참여, 주요 전시회로 1981년 첫 개인전 ‘문맹자 시리즈’(문예진흥원 미술회 관), 2004년 제7회 김경인개인전(학고제)이 있음
- 1994년 제6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 효성여대, 인하대 사범대 교수 등 역임 현재 인하대 예술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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