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송악산 전경(아산만의 관문에 위치한 산으로 정상에서 내포 평야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 / 신동원 기자

송악산은 옛 중흥면의 진산(鎭山)으로 과거 숭학사라는 절이 있어

숭학산이라 하였다.
『홍양기사』, 『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송악산 정상에 있는

송악산성은 김명배가 쌓고 동학군의 접주 이창구가 3년 주둔한 성이다.


송악산은 옛 면천군 중흥면(中興面)의 진산(鎭山)으로 중흥면 15개 리 중 과약리, 신대리, 사하리(중흥리), 내정리, 외정리, 주곡리(정곡리), 석교리, 호음리(석포리), 월곡리가 1914년 군현리 통폐합에 따라 송악산을 중심으로 홍주군 신북면 지역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악면 석포리, 중흥리, 정곡리, 월곡리가 되었다.


이 산은 높이 148.2m로 전에 숭학사라는 절이 있어 숭학산(崇鶴山)이라 하였는데 이 산명이 변하여 송악산이 되었다. 현 중흥리 지역은 옛 면천군의 중흥면사무소가 있던 곳으로 1900년 초까지만 해도 모든 행정의 중심지로 학교, 면사무소 등 각종 관공서들이 이곳에 밀집되어 있다가 1909년 당진경찰서 기지시 순사주재소가 현 기지시리로 최초로 생겼고 1918년 송악면 중흥리에 있던 송악면사무소가 기지시리로 옮겨갔다.


즉 처음 송악면사무소는 중흥리에 설립되어 1914년 1월 김종태 면장이 발령을 받았고 공립송악보통학교가 1920년 6월 5일 개교했다.


송악산에는 송악산성 성터가 산 정상 월곡리 접경부근에 1950년대 말까지 있었으나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마을길과 담 등을 치고자 훼손되어 이젠 일부만 남아 있는데 이와 관련된 기록은 1936년 발간된 『당진군사』에 남아 있다.


“숭학산 농보성은 석성으로 되어 있으며 혹은 봉수산이라고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갑오년에 동비(동학당)가 난을 일으켜 사경(사방으로)이 크게 놀라게 했는데 동비 괴수는 이창구로 송악산아래 월곡리 기지시리 국사봉에 이르는 사이를 근거지로 하여 진을 쳐 따르는 부하가 1만 명이 넘었다.

그 때 김명배가 시국강구책을 비밀리에 도모하여 동년 8월 12일 기치를 크게 높였고, 약 3천 명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여 토석을 운반하여 그 성을 쌓아 대항하였으나 세가 부족하여 동년 10월 13일 성을 포기하고 보장 김명배는 동지들을 해산하고 잠복하였다. 동월 23일 이창구를 생포 홍주 초토영으로 압송하여 즉시 사형에 처하였다."


즉 1894년 8월 12일 김명배를 중심으로 3천 명이 테미성으로 정상부위에 뺑 둘러 석축, 토축(土築)하였고 『홍양기사』 9월 23일자 기록에는 동학 접주 이창구가 김석교의 첩을 이용해 생포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송악면 중흥리·월곡리·오곡리에 걸쳐있는 송악산성은 내포의 관문이었다.


그 당시 내포지역에서 한양을 가는 바닷길은 한진리의 대진나루를 거쳐야 하는 형편에서 송악산성은 중요한 지역으로 김윤식이 일본공사에게 내포동학당(內浦東學黨)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한 것을 보면 “내포적 이창구는 많은 적도(賊徒)들을 옹호하고 숭학산의 민보(民堡)를 탈취하고 있으므로 내포의 열읍(列邑)들이 모두 그 해독(害毒)을 입었다고 합니다…

숭학보(崇鶴堡)는 비록 수원(水原)에 속하지만, 한여울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므로 만일 경병(輕兵)으로 공격하면 단번에 잔멸되어 남은 사람들도 다 해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을 다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곡물을 수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일본공사관기록)하고 있으며, 『홍양기사』에도「이적이 면천 숭학지농보(송악산성)에 거처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지역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송악산성은 이종군(李種君)이 2000명을 데리고 와서 성을 쌓고 3년을 주둔했다.
성은 석성과 토성으로 축성했는데, 당시 송악면 중흥리에 살던 김종선, 김원근 등 연안김씨들이 큰 독을 떠다 성을 쌓았으며, 송악산성에 움집을 짓고 옹달샘 물을 먹고 대치했다.


이종군은 들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송악산과 관련된 다른 전설로 괴탑과 김복선이 앉은 자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다.

▲ 송악면 중흥리 현 노인회관 터가 ‘괘탑부리(고이탑 뿌리)’라는 곳이다
① 괘탑

송악면 중흥리 현 노인회관 터가 「괘탑부리(고이탑 뿌리)」라는 곳이다.
이곳에 지평 이완(持平 李莞)과 부인 고성 이씨의 묘가 있는데 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연안 이씨 집안에 친상을 당하여 백방으로 묘 자리를 잡으려고 애를 썼다.


이를 지나가던 중이 알고 딱하게 여겨 묘 자리를 잡아 주게 되었다.
“이 곳에 묘를 쓰면 평양감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묘를 쓰고 나서 벼슬도 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었다.


그런데도 터를 잡아준 폐백비(幣帛費)를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관작이 올라 도문잔치를 크게 벌였다. 사람들이 모여 실컷 먹고 즐기는데 그 때에 중이 대감을 뵈러 왔다는 연통이 왔다.


하인을 통해
“중 같은 사람 상대하기가 싫다.”하니 “아무개 묘자리 잡아준 중이라 여쭈어라.”했는데 “그런 일이 없다.”고 하니 중이 “내가 그 묘에 대하여 꼭 할 말이 있어 왔다가 그냥 간다고 여쭈어라.”하고 떠나가니 그 중을 불러들여 “무슨 말인가 대관절 해 보아라.”하니

중이 말하길 “이 묘의 형국은 야서형(野鼠形: 老鼠下田形)으로 쥐가 송악산에서 들로 물을 먹으러 내려오는 형국이다. 쥐라는 것이 물을 먹으러 내려왔다가 다 먹고 나면 산으로 다시 올라간다.
그 것을 막으려면 고양이탑을 만들어 묻으면 쥐가 올라가지 못해 더 잘 됩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더 잘되고자 괘탑을 만들어 묻었다. 그런 뒤에 그 자손이 망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송악산 정상의 송악산성 성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② 김복선이 앉은 바위

송악산 아래 숭학사(崇鶴寺)가 있었는데 그곳에 김복선이 왔다가 앉았었다고 하는 큰 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그 절 주변은 아름드리 큰 수목이 울창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깎아지른 산으로 김복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김복선은 워낙 힘이 세었던 장수였는데 그가 그 바위에 앉았다가 일어나니 그 자리가 패여 지금도 주먹을 쥔 자국과 함께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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